2007.1.26


24일 첫 버스로 서울길에 나섰다.
뭐 기타 등등한 일들로.
가는 길 편안했고 밀리지 않았다.
봉동리부부공작단은 서울에 입성한 이후 각각 제 볼 일 보러 길을 서둘렀다.
생각보다 일이 늦어졌다.
상수역 2번 출구에서 imblue  회사 건물을 흘깃 쳐다만 보고 그냥 통과했다.
길을 따라 cafe undo에 도착하고 보니 오후 다섯시가 넘었다.
나무가 앉아 있었다. 그냥 누워 있지.
02는 제 집이니 서다가 앉다가를 반복하고 있었고
상윤이가 회사에서 쓸모가 없는지 일찍 왔다.
빵순이가 좀 더 늦게 도착하고 앞으로 펼쳐질 담배피기 경연대회를 생각하니
머리가 이미 아파왔다. 서울만 오면 편두통이 온다. 필시 두배로 증가하는
담배 피기와 사람들, 공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서울은 계속 살았던 것 처럼 익숙하다.
거의 건질 것 없는 소리들만 나누고 나무의 참치샌드위치를 1/4 훔쳐먹었다.
H군이 갈기를 휘날리며 들어섰지만 앉을 틈을 주지 않기 위해 바로 코케인으로 이동했다.
코케인에는 아직 코케인이 없었다.
인도를 다녀왔다는 그 바텐이 보였고 인도를 다녀 온 H군은 인사를 하더라.
메니저K는 낮부터 백수들의 전유물인 등반과 막걸리를 마시고 있다는 기별만 전해들었다.
왜 이리 순서와 인물들이 가물거리나...
잠시 후, 가게 주인 코케인이 출근하자마자 상윤이가 타박하는 소리를 했다.
내가 사장이라도 메니저K와 상윤이 등살에 가게 오기 싫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에 마이가 입구에서부터 댄싱을 시도하면서 들어오는 것이
이미 낮부터 심히 알콜을 주입한 듯 했고 스물다섯살 된 예쁜 후배를 하나 데리고
들어왔는데 왜 이 아가씨 이름이 생각나지 않냐. 여튼.
일어와 한국어와 육회 타령이 짬뽕된 대화라 할 수 없는 소리들이 계속되었다.
이번에 확인한 사실은 이 자들이 우리 부부를 보기 위해 구례로 오는 것이 아니라
육회를 노리고 오는 것이었다.
맥주 반잔에 나는 제법 술이 오른 느낌이었고 관자놀이가 팔딱거렸다.
그래서 뜨거운 차를 시키고 음료를 마셨다. 나를 무시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어느 대목 즈음에서 메니저K와 오광파들이 전작을 동반하고 도착했다.
실로 몇 개월만에 원씂을 보았다. 어찌 편애하지 않을 수 있는가.
원씂은 회사 일로 우연히 제주도에서 출장을 왔다하니 더욱 반갑다.
다행인 것은 이날은 알차맨이 "어! 형님 저 기억하시겠어요?"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울산에서 막 도착한 틈씨가 들어선 것이 아마도 거의 10시가 넘지 않았나 싶다.
여전히 마이는 막무가내였고 마이의 후배도 맥주잔을 제법 갈아치운 듯 하다.
상윤이가 마이를 노홍철이라고 칭했지만 마이는 불행하게 노홍철을 몰랐다.
언화도 3병 정도는 마신 듯 한데 나는 술기운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코케인의 '어두운 조력' 덕분에 신중현의 Body&Feel 더블앨범 가상본을 받았다.
(이상 없이 차 안에서 잘 듣고 있다는.)
게임이 종반을 향해 치닫는데 잠수함이 역시 다른 곳에서 주유하다가 나타나다.
결혼발표 기자회견을 하기에는 좀 취해 보였다. 그리고 역시 육회타령을 하기 시작했다.
에릭클랩튼 공연 관람기를 동작과 함께 재현하여 보여주었다. 동작 정도로 보아서
90분 정도는 더 주유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오늘도 우연히 에릭클랩튼 음악을 듣다가 잠수함의 빈손 기타연주 모습이
오버랩되어 모든 에릭클랩튼 파일을 삭제했다.
여튼 대충 아수라장이 된 연후인 자정에 옛투독하우스 주인장 내외가 홍대 앞으로
데리러 온 까닭에 일어서다. 우리의 이날 숙소는 연신내 로미네 집이다.
마이가 분노에 찬 눈빛으로 H군과의 관계를 청산한 장면은 기억이 난다.
마이에게 버림받은 상심한 H군을 데리고 로미네 메르세데스프린스 뒷좌석에 올랐는데...
평소 로미와 데니의 자리인 관계로 뒷 좌석은 마루와 같은 형식이고 우리는
마루에 올라 '실려갔다.'
연신내 로미네는 처음 방문이지만 사이트에서 자주 본 관계로 편했다.
새벽 3시 즈음에 마루에서의 한담을 파하고 잠이 들었다.






2007년 1월 25일 아침, 폭포동 입구 모습.






2004년인가, 2005년인가 어느날의 폭포동 입구 골목.


오전 11시에 아침을 먹자하고 지난 밤을 마감했지만
5시 즈음에 잠이 든 나는 8시부터 눈을 뜨고 오락가락 하다가 9시 즈음에
언화와 옛 살던 곳, 가장 많이 산책을 나갔던 폭포동과 기자촌 방면으로 산책을 나갔다.
우리가 연신내를 떠나기 전에 이미 은평뉴타운으로 인한 철거작업은 시작되었지만
폭포동이 박살난 모습은 생경했고 실망스러웠다.
언제나 사진을 찍던 폭포동 입구는 전망지점 조차 확보할 수 없었고 개발과 보상의
아우성만 난무했다.
이 방향의 산책로가 절단난 상황에서 우리들의 연신내 살이는 아마 굉장히 팍팍했을 것이다.
지난 시절 나의 연신내戀歌가 뭔가?
아름다워 戀歌가 아니라 살이의 고단함과 이곳의 상투성을 껴안기 위한 나를 위한 戀歌가 아니었던가.
협로를 뚫고 계곡 저 끝에 꽃 한송이 있다는 상징적 깃발이 아니었던가.
기자촌 방면과 폭포동길이 제공한 녹색이 아니었다면 연신내에서의 생활은
회색뿐이었을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이 길을 더 이상 서성일 필요는 없다.
나는 이 길에 대해 책임이 없다.
하지만 기억은 현재를 아프게 하는 뒷맛을 숨기고 있다.
이제 연신내戀歌는 이곳 사이트에서만 존재한다.
연신내의 화양연화는 지나갔다.
하지만 사람은 새로이 도래할 화양연화를 쫓아 길을 떠난다.
약간 늦은 오후에 구례행 버스가 출발했다.


4d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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