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dr Date : 2007/02/15
2007.2.15


혼자 화요일 아침에 서울 가서 수요일 밤에 구례 도착하다.







덕수궁미술관의 2007년 첫 전시는 마리노 마리오展이다.
오프닝을 촬영한다는 명목이었지만 이번에는 작업 전에 미팅을 하지 않고
메일로만 업무를 진행했기에 몇 가지 자료 문제 등등 해서 방문하는 것이
'을의 길'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갈리토는 제 길로만 가다가 죽더라.
여튼 좋아했던 조각가의 전시이다보니 다행이다.
좋아하는 작가의 사이트를 디자인하는 일은 아무래도 한결 수월하다.
이해와 지지가 전제되기 때문이다.







이태리대사관은 작정을 했는지 이 전시를 이태리를 홍보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듯 했다.
대사관과 문화원, 마리니재단의 준비와 관여 정도는 다른 전시 때보다 디테일하다는 느낌이었다.
요리사들 또한 모두 이태리 사람들이다.
다른 전시 오프닝 보다 퀄리티가 높다.
그러나 나는 이상하게도 한 입도 맛보지 않았다.
사진을 찍고 있어서? 아니.
토종 음식만 좋아해서? 아니.
저 아래 펼쳐진 두 종류의 라자니아는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이기도 하고
한 때 저놈에 라자니아 잘한다는 집도 찾아다녔다.
가장 자리의 염장한 돼지고기는 언제나 나의 로망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나는 행사 두시간 전에 남대문 시장에서 조선 파스타 남대문칼국수와 서비스로 나오는 냉면을
공양한 탓인지 도통 음식에 손이 가지 않았다. 3,500원이었다.
다음날 저녁, 사진을 본 언화는 나의 행동을 질책했다.







대사관에서 직접 공수해 온 와인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농협에도 있는데.
여튼 다른 나라 대사관 손님들을 많이 청한 듯 했다.
사진을 찍다가 말미에 와인 반잔을 마셨다.
좀 쉬는 타이밍이기도 하고 이미 100장 이상 셔터를 누른 상태였다.
음식에 몰려 있는 사람들을 뒤로 하고 한적한 전시장에 섰는데
저기에 안면 있는 여성이 있다. 누구더라?
그 여성도 나를 보고 '누구더라' 하는 표정을 같이 3초 정도 취하다가
동시에 생각이 난 모양이다. H군과 함께 구례를 방문한 친구들 중 한 사람이었다.
순간 여성의 입에서 "아, 육회 아저씨!' 라는 소리가 튀어 나올 것 같은 입모양을 보았다면
노이로제일까.







구례의 환경과, 사람들과, 풍광과는 다른 이야기들을 디자인하고 그런 이벤트의
중간에서 나는 나의 디자인이 소용되는 과정과 경로를 사실 피부로 실감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구례에 살기 때문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그러하다.
하지만 나는 마치 그 작가를, 그 작가가 살았던 시절을 아는 듯 뭔가를 디자인한다.
내가 마리니展을 기획했다면 '거세된 신화'라는 용어를 동원했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마리니의 매력이다.
조금 전 까지 어차피 설연휴 때문에 이동할 예정이라 완료하지 못한 사이트 디자인의
월페이퍼를 만들었다. 간혹 내가 만든 월페이퍼가 바탕화면으로 지정된 모니터를 만날 때가 있다.
그것 역시 소용되는 것이다. 뭔가 만들었다면 소용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가장 결정적으로는 사이트도, 월페이퍼도, 어떤 세련된 디자인도
딱히 생활에, 살이에 소용되는 경우는 드물다.
왜냐면 세상살이는 그것을 딱히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디자인 한다는 것, 뭔가 꾸민다는 일의 궁극적인 허망함은 그것이다.
조금 전에 만든 덕수궁미술관용 월페이퍼다. 1280사이즈 모니터 전용이다.
내려받아서 '소용당하기를' 바란다.

http://iam2jang.cdn3.cafe24.com/room/1963070215.zip







서울에 올라가 있었던 이틀 동안 지리산형에게 두번 전화했다.
화요일 낮에 사진의 문수리 관광안내 사인물을 설치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내가 서울로 올라가는 동안 작업했을 것이다.
비가 온다고 했기에 궁금했다.
구례에 내려 온 이후 실질적으로 나의 기능이 처음으로 '소용'되었다.
소정 변관식의 그림에 등장하는 나그네들을 아이콘으로 사용하고
가지고 있던 로고타입 '문수골'을 공개적으로 사용했다.
이전 나의 이곳 방문시 항상 불편했던 '지역번호'를 표기해 넣었다.
서울 밖으로 여행가서 그 마을의 지역번호를 찾는 불편함을 간혹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가 이곳으로 여행왔던 경험에서 느낀 '필요정보'였다.
여백을 다른 때 보다 많이 남겨두지 않고 반달곰센터가 있는 문수골의 특성을 위해
반달곰을 그렸다. 지리산 반달곰은 아직 공식적인 캐릭터가 없다.
포괄적인 C.I 영역이겠지만 나는 지리산권을 통일된 C.I로 정리하는 일에 관심이 많다.
더 간략화해야는데 일단 일러스트 파일로 제작했다는 기반은 가지게 되었다.
나무는 고로쇠다. 이 골짜기는 질 높은 고로쇠가 지금 이 시기에 생산된다.
민박집들의 전화번호를 수록했다. 주민회의에서 교정본 것이다.
이 역시 평소 나의 디자인 행태와 많이 다른 것이고 내가 제안한 것이다.
필요한 정보를 정확하게 배치하는 것에 중심을 두었고 '세련'을 많이 포기했다.
오늘 오후에 시공 상태 확인하고 사진 촬영하러 올라갔는데 교정본 이장님이...
자신의 민박집 전화번호가 빠졌단다. 하, 이장님 쫌...







문수골의 높은 지대에 자리한 민박집에서 머물렀다면 돌아오는 길에
이 사인물을 만나게 된다.
돌아가는 사람들에게 뭔가 인사를 해야한다.
이전에 내가 이곳을 방문하고 서울로 돌아갔을 때의 증상을 기억했다.
디자인에서 거의 명조와 고딕만을 사용하는 내가, 글씨를 아주 작게 배치하는 내가,
큼직하고 두터운 서체를 선택해서 내가 느꼈던 감정을 인사말로 제작했다.
원본 사진이 백번 좋지만 배경 지리산은 곰그림 때문에 할 수 없이 다시 그렸다.
글씨 잘 보여라고. 이 역시 평소 나 답지 않은 배치 행태에 해당한다.
언젠가 지리산형과 이야기했다. 내가 구례군 군수라면
광화문 지하보도에 설치된 지자체 광고 대형 사인물에 지리산 사진 쫘악 깔고
단 한 줄 카피만 단아한 명조로 넣겠다고 말했다.
"행복하십니까"
하지만 나는 문수골 사인물에서 그렇게 단아하게 하지 않았다. 스스로.







언화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고 했다.
마리노 마리니展 디자인 보다 세련되지 못한 사인물 앞에서
마리노 마리니展 디자인 보다 더 직접적으로 '소용'될 확신이 있기에 기념하고 싶었다.
마리노 마리니展은 나에게 일용할 '양식'을 제공하지만
일러스트 작업에서 많은 시간을 투여한 '문수마을관광안내도'는 나에게 '의미'를 제공한다.
마리노 마리니展의 월페이퍼는 없어도 살아가는데 전혀 불편함이 없지만
문수골관광안내도는 방문객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것이다.
우연히라도 저 앞에 차를 세우고 사인물에 기록된 민박집 중 한 곳에 전화를 거는 가족들을
발견한다면, 그들이 '어, 지역번호도 있네'라고 말 한다면 나는 아주 기쁠 것 같다.
그런 가능성을 높여 간다면 대한민국 최고령 웹디자이너의 근원적인 허망함은
사라지게 될지도 모른다.

설 명절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금요일 아침에 출발합니다.
며칠간 이곳을 쉴 것이고 다음주에나 뵙겠습니다.
혹시 화해해야 할 가족이 있다면 먼저 사과하십시요.
어렵지 않습니다.


4d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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