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dr Date : 2007/03/06
2007.3.6


누구나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은 '깊은 산 속에 쳐박혀' 익명으로 살았으면 하는
생각을 한번은 해 볼 것이다. 하지만 만명 중 구천구백구십구명은 처성자옥妻城子獄이라
자신의 일상 테두리 밖으로 한발 벗어나기도 힘들다.
사실 그 한발이 이후 전개될 백보의 절반 이상 의미일 것이다.
서울 사는 월급쟁이 60% 이상이 시골에서 살기를 희망한단다.
살기 팍팍하단 소리겠지. 세상만사 돈이 최고가 아니란 것은 돈 없는 사람들이
입만 열면 하는 소리다. 나 역시 이미 밝혔지만 취할 재주가 없을 뿐이지
세상 무엇보다 돈을 가장 좋아하지 않는가. 그 고리를 끊어 내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지리산 가이드북 성격의 두어권 책을 지난 설 연휴 부산에서 읽다가 만나게 된 이름
우천宇天 허만수許萬壽. 산을 타는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우천 선생님'인 모양인데
산을 타는 사람이 아닌 나는 몰랐던 사람. 마침 내가 구례에 기거하고 있고
산을 잘 타지는 못하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산을 오르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기에
그의 행적에 관한 이야기는 최근 관심사 중 하나다.
신라시대 최치원을 제외하면 지리산人으로 이 사람이 가장 많이 거론되는 듯 하다.
더구나 그와 만나본 사람이 여럿 실존하고 홀연히 사라진 그의 마지막에 대한
이야기는 충분히 상상력을 자극한다. 결국 그의 마지막이 클라이막스이자 미스터리다.
그리고 그 '실종'에 그에 대한 '전설'과 '사실' 여부에 의문이 집중된 듯 하다.
최초 출처가 명확하지 않은 타인들의 글을 죄송스럽지만 내 방식으로 짬뽕 정리하자면 이렇다.


우천 허만수는 1916년 진주시 옥봉에서 태어났다.
10살때 일본으로 건너갔다. 산을 알게 된 것은 고교시절이었고 '동정클럽' 이란 모임이었다.
여자를 멀리하고 산을 즐긴다고 이름을 그렇게 했다고 한다.
경도전문대 철학과를 다녔다. 그의 부친은 산에 미친 그를 일시 귀국시켜 강제결혼을 시켰다는 설과
강제징집 당했다가 광복 후 진주로 돌아와 부인 전경림과 결혼했다는 설이 공존한다.
여튼 청자, 덕임, 영희 세 딸을 두었고 한동안 진주에서 서점을 운영하기도 했다.
허만수가 지리산으로 들어 온 것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0년대 중반으로 짐작된다.
서점도 가족도 팽개치고 자굴산을 거쳐 세석고원에 올라 움막을 짓고 원시인처럼 생활했다.
그의 나이 33세 때였다고 추정한다.
훨씬 뒤에 그는 세석평전에서 사람이 묵을 수 있는 움막을 한 채 마련했다.
하지만 일부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의령 자굴산에서 곧장 세석고원으로 올라
산중생활을 시작한 것이 아닌 듯 하다.
세석고원에 오르기 전에 쌍계사 윗편 의신마을 쪽에서 오랫 동안 벌목 일로 품삯을 받고
연명한 듯 하다. 법계사 초막의 손보살과 곡점리 주막집 안주인이 이 대목에서 등장한다.
중산리 못 미처 거림골과 갈림길목에 위치한 곡점리는 당시 지리산으로 오르는 주요한 길목이었다.
이곳에 인구에 회자될 만한 지적인 용모와 인정 많은 한 중년여성이 국밥집을 열고 있었는데,
홀로 산중생활을 하는 잘생긴 남자 우천에게 호의를 가지고  밥과 술을 한껏 제공했다고 한다.
손보살의 법계사 초막 또한 세석고원의 우천과 천왕봉 토굴산장의 김순용노인이
자기집처럼 먹고 잠자며 이용했다는 것이 부산 산악인들의 증언이다.
1961년 여름방학 때 광주 조선대학교 약학과 1학년 학생 13명이
지도교수 안학수 박사 인솔로 약초 채집을 위해 세석고원에 올랐다.
이들이 묵은 곳이 우천의 그 초막이었다.
당시 조선대 학생으로 이 약초 채집에 참석했던 부산의 노금모는
그 초막의 모습을 찍은 흑백사진을 간직해오던 사진이 아래 모습이다.





풀과 나무와 흙으로 지은 움막이다. 그 시절이니 가능한 것이다.
요즘에야 관리공단에서 바로 철거를 할 것이다. 지리산 종주 능선에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하지만 그 시절엔 이 움막이 대피소 역할도 했다.
1961년 8월1일 지리산 일대에 태풍 '너러'호가 강습했다.
부산의 산악인 김경렬 등 일행 24명은 산중에서 탈출을 시도했으나
예닐곱 명이 낙오돼 수색대가 출동한 소동 끝에 가까스로 우천의 초막으로 대피시켰다.
그들은 사흘 밤낮을 그곳에 갇혀 있는 동안 2명의 환자가 발생했다.
환자 후송이 불가피하여 그들은 왼쪽 능선을 타고 내려오다 계곡을 만나
우천의 도움으로 자일을 설치하고 간신히 건널 수 있었다고 한다.
우천은 지리산에서 100명이 넘는 조난자 생명을 구조했고,
산에서 죽은 사람들을 산 아래로 운반하는 것도 그의 일이었다.
그는 또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는 칠선계곡과 한신계곡 등 6개 비경 코스를
열었으며, 등산로 곳곳에 샘을 파고 보수 관리를 했다.
폭우로 유실된 산길은 나무와 흙, 돌로 더 좋게 고쳤다.
그는 천왕봉 통천문(通天門)에 해마다 낡은 사다리를 치우고
다시 새로운 나무다리를 만들어 놓았다.
그는 타고난 체력으로 산길을 날아다니다시피 했다.
"축지법을 구사하는 사람" 이라는 전설은 그래서 생겨난 말일 것이다.
아침에 세석고원을 출발하여 걸어서 진주로 나가 볼일을 본 뒤
그날 자정 안에 걸어서 세석의 움막에 돌아오고는 했다.
우리들이 지금 공식 등산로로 즐기는 여러가지 편리함이 그로부터 시작된 일이고
그가 시작한 일로 인해 사람들이 지리산을 찾는 일이 편해졌고
편해지니 많이 찾았고 많이 찾으니 훼손되고 그는 절망했다.
1976년6월 어느날 "나를 찾지 말라"는 말을 남긴채 홀연히 모습을 감췄다.
"아무도 찾지 못하는 칠선계곡으로 들어가 묻힐 것이다"고 입버릇처럼 말을 했다 한다.
그해 6월 어느날이 우천 삶의 끝이라는 것을 추정만 할 따름이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살해'라는 표현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의 마지막 종적에 대해 의문을 표하기도 한다.
"말년에는 밥은 입에도 대지 않고 술만 마셨지.
하루 종일 술에 취해 있는 모습이 폐인과 다름없어 안타까웠어.
그가 나중에는 일부 난폭한 등산객에게 구타를 당하는 일도 있었다니까."
노고단에서 곧잘 세석의 우천을 찾았던 함태식옹의 말이다.
함태식옹은 지금도 피아골 산장과 차단된 왕시루봉의 외국인산장지기를 겸하며
지리산에서 살고 있다. 조만간 이 노인을 한번 만나 인터뷰해 볼 생각이다.
지리산 일대에서 도벌꾼 단속활동을 벌였던 로타리산장 조재영 또한
같은 맥락의 이야기를 한다.
"그 당시엔 지리산이 아주 거칠었다. 도벌꾼들이 사람들에게 도끼를
휘두르는가 하면, 산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오른 젊은이들이 행패를 부리기 일쑤였다.
세석고원에선 근래까지 칼부림 사건이 발생하고는 하지 않은가.
우천의 증발에 대한 미스터리도 그런 의문에서 추적돼야 제대로 풀릴 수 있다고 생각된다."
나는 이런 증언들의 뼈다구는 '살해說' 이라고 생각한다.
술취한 산사람을 술취한 도벌꾼이나 등산객들이 시비 끝에 살해했을 수도 있지 않은가.
이후, 그를 기리는 산악인들이 그가 말하던 칠선계곡에서 흔적을 찾아보려 했으나
아무런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
진주의 산악인들은 고인의 높은 지리산 사랑을 기려 중산리 등산로 입구에
추모비를 세워 매년 철쭉제 행사 때마다 이 곳에서 제를 올린다.





여기까지가 우천 허만수에 대한 '전설'과 '사실'의 혼합구성이다.
물론 어디까지가 전설이고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나는 가늠할 수 없다.
다만 최치원 시절의 이야기도 아니고 근자의 인물에 대한 이야기이고
만났던 사람들 역시 아직 존재하니 기회가 된다면 그들의 '추측'을 들어보는 것도
재미있는 시간일 것이다. 기회가 된다면.
전설은 향수와 현세의 곤궁함에서 비롯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전설의 맥락을 해석하는 일이 고대사의 주된 일 아닌가. 하물며 불과 수십년 전의
어떤 인물에 대한 이야기는 신비감을 현실화시키는 명분이 된다.
이 동네는 근대 사주명리학의 전설 개운조사가 이백년의 세월을 넘어 아직 반야봉 아래
어딘가에 생존해 있다고 믿고, 찾아 헤매는 도사들이 들락거리는 山 지리산이다.
하여 나는 이런 說들을 존중하고 믿고 싶다.
그것은 오늘의 주식시세와 환율 등락폭과는 다른 '미지'에 해당하는 세상이며
오늘 처럼 멀리 노고단이 하얗고 바람 많이 부는 봄날에 이곳에서 누려봄직한
이야기 한 토막일 것이다.
일탈을 꿈꾸는가?
지금 감행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처성자옥妻城子獄은 핑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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