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3.29


역시 같은 위치들이다.
이틀이 지났고 나는 1등에서 10등까지를 모두 보는 것 보다
1등을 열번 보는 방식을 선호한다.
오늘의 결론은 '나는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이틀 전이 만개인 줄 알았는데 오늘은 훨씬 더 피었다.
하여 이제는 그 끝이 내일이다, 이틀 뒤다라고 말하지 못하겠다.









아홉시 넘어 눈을 켰는데 창밖이 밝다.
비가 오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커튼을 열고 노고단 쪽을 바라본다. 내 하루의 시작은 항상 그렇다.
노고단은 탁하지만 햇볕은 살아 있는 듯 하다.
그래 다시 나섰다.
그리고 같은 장소에 주차하고 같은 자세로 도로 중앙선을 도도하게 걸어서
때로 스쳐가는 차들의 곱지 않은 눈길을 무시하고 사진을 찍었다.









차들이 지나가면 꽃잎이 날렸다.
작은 차는 작은 바람을 남겼고 큰 차는 큰 바람을 남겼다.
작은 바람은 꽃잎을 조금 휩쓸어갔고 큰 바람은 꽃잎을 많이 휩쓸어 갔다.









이 길은 중기마을 앞이다.
길지 않은 도로지만 가장 안정적인 도로와 나무의 수평을 가지고 있다.
평온해진다. 어제, 나는 오늘 사진을 찍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하룻밤의 잠은 많은 것을 번복하게 만들었다.
나는 어제밤 늦게 서울에서 돌아왔다.









오늘은 목요일. 이틀 전 보다 차량 이동이 더 많다.
빈 도로 상태의 이 장면을 찍기 위해 많은 헛셔터질을 했다.
오늘 언화는 하늘색 옷을 입고 맨발로 서 있었다.









다시 쌍계사 길 입구로 들어왔다.
꽃잎의 위력이 떨어졌을 것이란 내 예상을 비웃듯 꽃은 더 많이 피어있었다.
황사는 뚜렷했고 해는 오락가락했다.
관광버스들은 계속 이 좁은 길로 들어섰고 길가의 찐옥수수는 한개 이천원이었다.
그것은 아무리 우리편이라도 좀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고
사내는 꽃그늘 아래에서 웃는 얼굴로 옥수수를 팔고 있었다.









이어지는 버스와 사람들 행렬이 간혹 끊어지는 정도라 아랫길에서는
더 이상 사진을 찍지 않았다. 유턴해서 윗길로 들어섰다.
아랫길에서 나무 아래로 걸을 때 보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니 역시
꽃은 이틀 전과 비교할 정도가 아니었다.









어쩌면 꽃들이 햇볕과 황사까지 차단하고 있었다.
꽃잎이 바람과 비와 햇살과 황사를 막아서고 있는 듯한 의외의 완강함은
자신의 '때' 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2월 설 지내고 올라오면서 매화의 시작을 보면서부터 오늘까지
이곳의 변화는 무서운 속도감 그 자체였다.









꽃들의 유전자는 탁월한 경쟁력은 물론이고 때를 기다려 피어나기 위해
수 없이 많은 조롱과 치욕까지 견디어 내도록 진화한 모양이다.
진화는 복제의 원리상 디지털적일 수밖에 없고 감상하는 인간의 감성코드는 아날로그적이다.
아날로그의 본질이자 아픔이자 매력은 손상되고 변질될 수 있다는 점이고
그래서 나는 어제의 기분과 다르게 오늘 다시 사진을 찍고 있는 것이다.









어제 오후 한시 넘어, 우산이 없었던 나는 점퍼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 쓰고
광화문 지하도로 후다닥 달렸는데 황사 먹구름이 점령한 광화문 네거리와
청와대 쪽은 마치 영화 '독립기념일'에서 거대한 외계우주선이 뉴욕 상공을
억누르고 있는 듯한 그로테스크가 있었다.
흘깃 보면서 '카메라를 들고 왔다면' 하는 생각이 3초 정도 머물렀다.
그리고 꽃들이 생각났다.









윗길을 걷는 잠시 잠시 햇살이 며칠 중 가장 그럴싸하게 내려왔다.
꽃그늘은 확연했고 나는 다시 밝아있었다.
수요일, 서울에서 나는 슬펐다.
돌아와서 헤아려보니 80개 정도의 지하철 구간을 이동했고
해가 질 때 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이동 중에 잠시 지상에 머무를 때 마다 담배를 피웠고
담배를 피울 때 마다 전화를 했다.









수요일 서울, 날씨는 좋지 않았고 바람과 비는 미친년 널뛰듯 했는데
나는 점퍼 속에 반팔티만 입고 있었다.
담배를 피면서, 통화를 하면서 머리 한켠에선 남쪽 꽃은 끝이 나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통화 내용과 꿏이 지는 것은 아무런 연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람은 종종 그런 반응을 보이기도 하고 담배불을 죽이고
나면 다음 동선을 염두에 두고 발걸음을 옮긴다.
그것은 나의 시간도 아니었고 나의 공간도 아니었고 온전한 나로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었다.









역할인지 성격인지 나의 위치는 대개 나의 슬픔을 내색하지 않도록 종용했다.
나는 대체적으로 스트레스로부터 먼 카테고리에 항상 나를 위치 지우려 했고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성공했다.
표현하지 않을 때 종종 이해받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대개의 경우 내색하는 자들에게 슬픔은 선점당했고 나의 역할은 위로였다.
습관은 고착화되고 남자가 마흔이 넘었다면 그것은 당연한 것이 된다.









전화가 온다.
지리산 형이다.
"거기 비오나?"
뭔 말일까 잠시 생각했다. 산 위에는 비 오는데 읍내에도 비가 오냐는 말일까...
"서울은 비 오는데요."
"어? 자네 서울인감? 나도 서울인디."
해질 무렵에 만나 같이 내려가기로 했다.
그것은 수요일 하루에 있어서 약간의 전환이자 희망이었다.
나도 누군가와 어떤 이야기라도 나눌 수 있다면 이 미친 날씨 몇 시간은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구중심처에 숨겨진 슬픔은 제외될 것이다.
고민을 털어 놓는다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3년에 한번 정도 그런 실수를 하고 나면 항상 후회스러웠다.
꼭 그 과정이 필요하다면 정신과 상담이 효과적일 것이다.
그것은 고해성사와 같은 익명성과 보안을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청취자는 직업적이고 심리학적으로 나의 이야기를 객관화할 것이고
그에게 나는 또 하나의 임상일 뿐이니 내 입을 떠난 말은 공기 중으로 흩어질 것이다.
흩어지지 않은 말은 결국 사람들 속에서 회자된다.
"이건 비밀인데 말이야..."









대기는 탁했다. 계곡 건너편에서 이쪽을 바라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나 역시 꽃을 보겠다고 꽃밭으로 들어왔는데 건너편에서 꽃밭을 바라 볼
생각은 잘 하지 않는다.









6:30 버스는 우등이 아닌 일반이라 고민하다가 그냥 표를 끊었다.
남원에 형의 트럭이 있는 모양이다. 어차피 이 시간, 이 날씨에 남원으로
내려가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나.
한시간 좀 남지 않은 시간, 밥을 먹어야지. 허기지기도 하다.
장터 삼천원짜리 국밥보다 못한 흥부형이 하는 보쌈집 이만원짜리 식사를 먹고
구례 사람들은 원래 그러려니 하고 생각한다.
연변에서 왔나? 조선족 말투의 아주머니가 암기형으로 주문을 받았다.









"뭔 교육받는다고 왔쏘. 약초?"
"아니... 쩌어거 뭔 웹 컨퍼런스가 있다고 해서."

웹기획자를 위한 약간 고가의 컨퍼런스가 서울에서만 개최된다.
어제 나무 심던 양반이 오늘 아침에 그것 듣겠다고 올라온다.
간혹 나에게도 날아오는 컨퍼런스의 강좌 내용은 대개 웹2.0에 대한 것이다.
소리 내지 않고 여전히 '속해' 있을 뿐만 아니라 '꼭' 이루겠다는
스스로의 담금질이다. 뻔히 기업들에서 보낸 실무 기획자들이 99%였을 것인데
문수골 해발 700m에서 몇 년간 나무 2만 그루 심은 벙거지 모자의 사내가 앉아 있었다.
그것도 처음이 아니다. 나에게 들킨 것이 처음일 뿐이다.
이루고자 하는 꿈을 가진 사람과 나의 차이점이다.





































이후를 생각하면 사진 사이즈가 더 커야한다는 약간의 아쉬움이 있다.
내 카메라의 최대 사이즈로 A3 인화는 가능해도 출력은 힘들다.
이후에 어떻게 소용될 것인지에 대한 간혹 잡념은 있어도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
그래서 항상 나의 행위는 지금 즐기고 지금 소용된다.

잠시 길 옆으로 빠졌다.
어제 서울에서 한끼만 먹어서 그런지 일찍 배가 고프다.
언화가 만든 떡과 차를 마셨다.
그리고 이 번잡하고 대단한 길가 위에 자리한 농가에서 다른 꽃을 본다.
















언화가 조팝나무일 것이라고 하는데 돌아와서 원씂의 블로그를 보니
조팝나무는 아닌 듯 한데... 잘 모르겠다.
꼬부랑 할머니가 길 아래를 내려다보고 계셨다.
우리를 잠시 바라보셨지만 이내 관심을 거두었다.









내려 오는 길에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금년에는 시각적으로 뭔가 성과가 있어야 한다는 점은 형이나 나나
인식하고 있는 부분이다.
만나야 할 사람들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함태식 선생을 비롯해서 지리산 자락의 몇몇 어르신들에 대한 인터뷰는
시간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연세가 팔순을 넘었기 때문이다.
조선일보 기자도 아니고 여성지 기자도 아니니 제대로 인터뷰를 해야 한다.
제대로라 함은 예의와 시간, 신뢰를 쌓은 인터뷰를 말하는 것이다.
녹취해야 할 것이고 글로 정리도 해얄 것이다.
가능하면 영정사진도 찍어둬야 할 것이다.
몇몇 분들은 내가 가능하면 만나지 않으려고 하는 외지에서 들어 온 낭인과나
허명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진정한 지리산 사람들이다.
벚꽃이 지고 나면 일을 시작하겠다고 말했다.
45일 정도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
꽃은 만발하고 통장은 바닥이다.
하지만 생각하는 일은 통장을 채울 일들은 아니다.









목요일.
나는 슬픔에서 깨어났고 그것은 불과 하루면 가능한 일이었다.
제거되지 않아도 사람은 스스로 그렇게 결정한다.
어쩌겠는가.









새벽 벚꽃을 찍어야겠다.
가능한 시간은 내일 뿐이다.
비가 올까.


4d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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