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4.6


오래간만에 짧은 컴퓨터 작업을 했었다.
그리고 필요에 의해서 사진들을 한곳으로 통합하고 정리하고
이른바 백업파일용 DVD를 구웠다. 미루어 두었던 일인데 좀 안심이 되긴 한다.
복사하고 넘기고 하는 중간 중간 옛 사진 파일들을 들여다보았다.
그리 오래된 과거가 아닌데 나와 그 당시 사람들은 상황과 관계에서 많이 변했다.
2001년에 니콘 쿨픽스 950이라는 똑딱이가 생겼다.
결국 기억의 대부분이 온전한 것은 사진들 때문이었다.
이곳을 보고 있는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은 2001년부터 게시판을 통해
나와 알고 지낸 사람일 것이다. 당시는 humani 시절이었고 어쩌면
초창기라 할 만한 시기에 참 열심히 놀았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은 '게시판 경비'다. 지금이 2007년이니 대략 만으로 6년이 지났다.
많은 이들을 오프라인에서 만나기도 했지만 더 많은 이들은 여전히 만나지 못했다.
별 이변이 없는 한 앞으로도 새로이 그 시절부터의 사람들을 만날 가능성은 없을 듯 하다.
세월이란 것이 그런 것 같다. 마치 '천리안 동호회 시절' 운운하는 것 처럼
얼굴 마주하지 않고 향기 나지 않는 자판과 모니터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거부하는 과정의 시간도 쌓이면 향기가 되고 추억이 되는 모양이다.
2001년, 나는 부산 해운대 4dr 사무실에 있었고 이후 서울을 돌아 지금은 구례에 있다.
2001년 그때 나는 2007년 현재 내가 구례에 살고 있을 것이란 어떤 예감도 하지 않았었다.
바다를 떠나는 일은 없을 것이란 막연한 생각은 무의식 중의 확신 같은 것이었다.
거의 매일 게시판으로 해운대와 청사포 사진과 글을 올렸다.
당시 humani는 경비에 불과했지만 나의 일기장 같은 공간이었고
지금 그 시절의 흔적은 디지털과 사이버 공간의 특성상 사라졌다.
차츰 차츰 사람들이 해운대 사무실로 찾아오기 시작했고
바다를 보고 해질녘이면 청사포로 넘어 가서 장어구이를 뒤집는 의례가 이어졌다.
사진이 남아 있으니 기억이 어제 같은 나날들이었다.







2001년 8월일 것이다.
부산 범어사를 영후와 함께 찾았고 절집과 계곡에서 한나절을 보냈다.
쿨픽스950은 대가리가 돌아가는 구조적 특성상 이런 셀카가 쉬웠다.
일전에 어떤 분을 처음 뵈었는데 나를 보고 일성이 '어! 머리 자르셨네요?' 였다.
그 분은 내 사이트를 처음부터 읽어 올라오는 중이었다.
내가 머리를 짧게 자른 것은 2004년 3월 27일이니 그 이후 나를 만난 사람들은
원래 내 머리 스타일이 그런 것이라 생각할 것이고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들은 '머리를 왜 그랬어?' 라는 반응을 보인다.
영후 참 많이 자랐구나.







해운대 크리스탈비치오피스텔 몇 호였지 육백 몇 호였는데...
2000년초부터 2년 가까이 이곳에서 시간을 보냈다.
쉽지 않은 시간이었다. 솔직히 힘들었다. 매월 관리비와 월세등을 납입하기도
힘들었고 대개는 한달씩 밀고 나갔다. 하지만 쉼없이 뭔가를 만들었고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2001년 하반기에 영후가 입원했다.
나는 일주일 동안 모든 일을 중단하고 병원에 같이 있었다.
아이를 병원에 두고 어머니와 교대한다거나 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수용할 수 없는 방법이었다. 직장 다니던 언화가 종종와서
영후 글공부를 보거나 그림을 같이 그렸다.
이런 사진을 보고 있자니 변화란 것은 순식간이고 매 순간은
변화를 품고 있는 시한폭탄 같은 것이란 생각이 든다.







매일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만큼 바다로 나갔다.
사무실에서 신호등 하나 건너면 해운대 바다였기 때문이다.
수평이 나의 기본적인 디자인 컨셉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내가 살았던
곳의 기억이 축적된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나는 지리산에서도 이어지는 산능선의 흐름을 수평으로 이해한다.
똑딱이 쿨픽스950은 혹사당했고 내가 만지는 기계는 언제나
사망으로 그 생명을 다했다.







4dr을 이룬 4명 중 한명인 231이 어느날 사무실로 인사하러 온 날이다.
해운대 시절을 시작하자 마자 231은 디지털타임즈로 입사해 서울로 날아갔고
이날 na02를 데리고 인사하러 온 것이다.
na02는 시아버지도 아니고 왜 이 사람에게 인사하러 와야 하는지 좀 뻘쭘했을 것이다.
나는 그 당시 사무실에 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댔다.
이제 쌍둥이 엄마아빠가 된 세월이니 이 역시 개인사에서 하나의 혁명이 아닌가.







역시 4dr의 막둥이였던 shery. '였던' 이라는 표현은 어쩌면 적절하지 않다.
지금은 서울의 그럴싸한 DB전문 회사에서 과장으로 근무하고 있지만
여전히 4dr 서버를 관리하고 있고 지금도 나와 일들을 진행하고 있다.
나와 띠동갑이니 올해 서른셋인가. 녀석 또한 두 아이의 아빠다.
이 시절, 때로 차비가 없어 사무실에서 잠을 자고 다음날 내가 와서야 늦은
아침을 먹기도 했다. 월급 없이 나와 몇년을 보내는 동안 정말 힘들면
'돈 좀 주세요.' 라고 표현했다. 잘 생기고 똑똑한 녀석이 그렇게 버틸 수
있었던 시간이 항상 고맙다. 간혹 녀석에게 "좀만 기다려라! 우리도 밤샘하고
요 앞 메리어트호텔에 방잡고 눈 붙이고 샤워하게 해 주께."
라는 거짓말을 했었다. 드문 경우는 아니었지만 경제적으로 힘든 20대를 보냈고
노력해서 한 분야에서 자리를 잡았으니 고마운 일이다.







한동안 같이 있기도 했고 떠나 있는 동안에도 시도 때도 없이 들락거렸던 사타.
자칭 타칭 4dr 객원 디자이너이자 웹모션 전문가.
이 사진이 찍힐 무렵 즈음에 녀석은 쿨픽스990과 sony 비디오캠을 장만했었다.
그리고 계속 사진을 만지더니 비디오캠은 사라지고 카메라만 잡고 있다.
여전히 취업하지 않고 있고 디지털시대의 특색 있는 사진작가 아이콘으로
변화했다. 하지만 본질은 뭐가 변했겠나. 좋지 않은 내장 구조상 해운대 단골 중국집의
흰색 짬뽕 '초마면'을 좋아했었지. 그 중국집 한번 가야할텐데.







해운대시절의 빼 놓을 수 없는 명사 검.푸른.
humani 맹신도이자 최대 비극의 주인공. 해운대 밤바다에서
초상화 그려주는 일로 밥벌어 먹고 살던 인간.
살아 온 이야기 자체로 몇 편의 영화가 되는 인간.
한명 그리면 2만원. 2명 그리면 괘안은 것이고 4명 그리면 다음날 닭한마리 잡아왔다.
일전에 산수유축제장에서도 거리의 화가들이 몇 보이길래
언화와 습관적으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자세히 얼굴들을 살펴봤다.
사진은 아마도 '꽃'이 보내준 감을 잘 먹고 있다는 게시판용 설정화면을
위해 찍었을 것이다.
인간아, 이곳 보고 있나? 잠수함 결혼 한 건 아나?
내 전화번호 그대로다.







역시 4dr 일원이었지만 당시 해운대 어느 옥션화랑의 사이트를 만들고 관리하면서
월급쟁이 생활하던 언화 또는 지금의 블로거 월인정원.
퇴근하면 바닷가길 따라 4dr사무실로 넘어왔었고 그것이 가능했던 같은 해운대 시절일 수
있었던 것 또한 우연은 아니었을 것이다.
모든 것은 불확실했고 그 모든 불확실성을 지나고 보니 새롭다.







밤바다를 자주 나갔다.
검푸른이 이젤을 펴는 시간 즈음에 바닷가를 걷고
담배 피고 자판기 뽑아서 그냥 바다를 보곤 했었다.
바다는 내 혈관 성분의 50%를 이루고 있을 것이다.
그 반복된 일상 속에 고통과 기쁨은 항상 새로운 날카로움과 따스함이었다.
바다를 가까이 두고 생존에 전력투구 하기란 쉽지 않다.
부자연스러움과 나른함 속에서 쉼없이 일했던 시절.
오목과 볼록을 쉼없이 오르락 내리락 하며 새끼와 가족의 안녕을 위해
단 한 순간도 포기하지 않았던 시간. 억지와 체념의 줄다리기 속에서
내가 많이 소진되어갔던 '아름다웠던 시절'.







사진을 보고 있자니 그 시절의 기억이 남아 있을 때
시간 내어서 기억을 붙잡아 둘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 시절은 이미 지나갔다는 생각이 교차하기도 한다.
6년. 나도 많이 변했구나.


4dr@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