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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1501.jpg



4월 14일 아침은 최근 날씨 중 볕이 가장 화사했다.
섬진강을 오른편으로 두고 19번 따라 악양으로 내려가면서 신록이 내 생각보다
이르다는 생각을 했다. 아주 오래간만에 그런 화사한 색을 보는 듯했다.
이곳에 살지만 의식한 눈길을 던지지 않으면 계절도 무감해진다는 사실을 알았다.
뒷좌석에는 카메라 가방이 있었지만 사진을 찍을 생각은 없었다.
카메라 배터리는 어차피 또 방전되어 있을 것이다. 카메라는 그냥 언제나 그 가방에 있을 뿐이다.
악양으로 내려가서 며칠 글을 쓸 생각이었다.
지난 몇 개월 동안 작업이 너무 지지부진하면서 나는 사실 아주 예민하고 날카로워진 상태다.
지난 몇 년간 몇 가지 일들을 벌여 놓고 동시다발적으로 각개전투를 하고 저녁이면 쉽게
글을 만들곤 했는데 내일 발표하지 않을 글을 몇 개월째 쓰고 있는 상황 자체가 어쩌면
처음 만나는 상황이다. 간명하게 표현하자면 ‘그 무엇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상태인 것이다.
나 보다 더 민감하게 이곳을 바라보는 분들도 계신 것인지 두세 분 전화를 주셨다.
언제든지 와서 공간을 사용하고 작업하시라고.
이게 뭔 난린가 싶기도 하고 타인의 같은 경우 그런 모습을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던
나의 이력도 있었던 탓에 ‘유난을 떠는’ 스스로의 꼬락서니가 역겨운 면도 있었다.
원래는 지난겨울부터 경주의 친구 회사 기숙사로 들어갈 생각을 몇 번 했었다.
철강산업단지라 한눈 팔 곳 없는 공단환경이고 무엇보다 기숙사와 구내식당이 있으니
그냥 먹고 자고 쓰는 일만 하면 될 것 같았다. 그러나 가지 않았다. 아니 가기 싫었다.
떠나지 못함은 결국 떠나기 싫다는 내 마음의 증거일 뿐이었다.
아주 긴 칩거도 아니고 짧으면 1주일, 길면 2주일 정도의 작업을 위해서 300km를
이동한다는 것도 마땅치 않았고 여기서 안 되는 글이 이동한다고 된다는 보장도 없었다.
이래저래 민폐고 나답지 않은 구질구질함이었다. 변명이 많으면 추하다.
그러나 오늘 나는 두 곳 사이트에서 나의 지지부진함에 대한 변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무엇도 진행되지 않았고 몇 번을 유보하고 취소하고 번복한 것이 지난 16개월이었다.
내 삶의 어느 맥락에서 나는 분명 입장과 태도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에 봉착한 것이다.
지리산닷컴을 재가동 한다고 한 마당에 왜 뭔가를 하지 않는지에 대한 질문도 종종 받는다.
계속 답변은 유보되고 질문은 반복된다. 나는 오로지 진행하는 책을 끝내고 어떤 결정이건
내릴 것이라는 기준점에 모든 변명을 미루어 두고 있는 꼬락서니다.


악양의 출판사에 도착하고 여섯 시간이 지나서 근 2주일 만에 한 꼭지 원고를 끝내었다.
남은 원고는 다섯 꼭지. 이렇게 며칠 출퇴근하면 정말 끝이 날 수도 있을까.
전화가 온다. 문상이다. 부산이다. 가지 않을 수 없는 친구다. 발인은 이틀 후.
그 저녁은 관청 사람들과 약속이고 다음 날 저녁은 일 년 동안 구례를 떠날 친구와의 약속이다.
수요일 아침에 부산으로 가는 방법 이외에는 없다. 악양 출근 하루 만에 패튼은 무너진다.
목요일은 연통 청소를 해야 할 것이고 순영이 형네 올라가서 분할 배송 완료 후 밀 잔량을
수거해 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월인정원 워크샵 장도 봐야 할 것이다.
결국 목요일도 악양으로 출근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다시 나에게 화가 날 것이다.
수요일은 부산에 210분 머물렀다. 운전을 하기 싫어서 버스를 탔다.
버스는 많이 흔들렸고 내가 운전해서 다녀 온 것 보다 더 피곤했다.
아침과 오후 모두 역광 상태로 강을 본다. 별 뜻 없는 아이폰 셔터를 몇 번 눌렀다.
화요일에 쓴 원고 중에 내가 나에게 한 소리가 있다.



살아오면서 까칠하다는 소리를 제법 들은 편이다.
무난한 사람은 아니라는 정도로 그런 지적을 인정하는 편이다.
아전인수(我田引水) 식 해석인지 모르겠지만 까칠하다는 말을
‘입장이 분명하다’는 말로 이해한다.
입장이 분명한 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에 대해서도 해석은 분분하겠지만
아빠는 어떤 사안 앞에서 입장을 명확히 하는 편이다.
말의 양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입이 묵직한 스타일 또한 분명 아니다.
듬직하고 신중하게 말없이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면 좀 답답해하는 편이다.
입장을 명확하게 밝히는 것도 신중한 태도의 한 모습이다.
물론 다물 때와 열 때를 구분하면 조금 더 아름다울 것이다.
때에 따라서 발표하지 않아도 알 사람은 안다.
그 말은, 발표해도 모르는 사람은 모른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만 발표는 증거로 소용되니 감당할 수 있을 때 하는 것이 좋겠지.
감당이 곧 능력이다.






4dr@naver.com



Atachment
첨부 '1'
  • 파르티잔 2015.04.16 10:08
    간당간당하군요. 기운내세요.
  • 4dr 2015.04.16 18:46
    기운이라... 마을이 좀 조용해야죠. 일단은.
  • 3류브로카 2015.04.16 10:27
    양쯔강 기단에서 발원했다는 거센 바람이 불고, 마지막 벚꽃잎들이 허둥지둥 휘말려 날아갑니다. "지리산공화국의 무한한 영광 있으라!" 같은 평양체 폰트 현수막 한 장 없이 '고난의 행군' 중 이시군요. 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말 한마디로 단순하게 정리될 것이 뻔한 답 안나오는 일들을 하기 위해 스위치 몇 개를 내리고 이제는 고물상에서도 안 받아줄 너덜대는 감정센서를 뽑고 그냥 바람 속에 서 있을 모양입니다. 명이나물, 숭어회 같은 것을 위안 삼는게 대역죄는 아니겠지요? 꽃이 지는 4월은 확실히 좀 잔인하긴 하네요.
  • 4dr 2015.04.16 18:47
    숭어는 뭐 5월 중순까지는 유효하지 않겠어요. 일단 이번 주는 아니고 그 다음주는... 뭐가 또 있네. 그러면 그 다음 주는 되지 않을까요. ㅎ
  • 크리스티나 2015.04.16 10:34
    감당이 곧 능력이다...
    오늘의 명언...으로 담아야겠습니다.^^
  • 4dr 2015.04.16 18:49
    바구니가 헐렁해 보입니다.
  • 김은희 2015.04.16 12:43
    그쵸, 감당이 곧 능력이죠. 살아남은 자가 강한 자라고도 하드만요..
    제가 하는 일은 아무리 길어야 2주 내에, 많은 경우에 주어진 기간 동안 종일 매달려야 끝낼 수 있는 일들인지라, 장기간 일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는 경우는 거의 없죠. 대신에 일을 시작하면 미친x 처럼 머릿 속에서 날뛰는 경우가 많아요.
    어느 쪽이 더 나쁜지는 잘 모르겠으나, 끝내지 못한 일에 대한 부채감은 다행인지 느껴 본 적이 없는 듯요. 뭐, 그럴 수가 없죠. 정해진 날짜에 일이 안 끝나면 쌩 난리가 나니까 ㅜㅜ
    16개월 동안 일을 끌고 오셨다니 정신적으로 엄청 지치신 상태일 듯요. 어떻게든 어서 일이 끝내지길 빌어 드립니다.
    오늘은 마치 장마철에 비오 듯이 천둥 번개 치며 비가 오네요. 벌써 1년이 되었다니...
    이장님, 화이팅~
  • 4dr 2015.04.16 18:50
    직업 중에서는 대통령이 제일 편해 보여요.
  • 어진 2015.04.16 20:40
    그건 아닌 것 같음.
    맨날 닭이라고 욕 얻어먹고
    칠푼이란 소리 듣고
    남자도 맘대로 못 만나고 ㅎ
  • 4dr 2015.04.16 23:30
    욕하는 사람들이 고통스러운 것 아닌가요. 몇 년 동안.
  • 미야씨 2015.04.21 09:05
    그러게요..욕하는 사람들이 피곤하고 힘드네요.ㅋ
  • 어진 2015.04.16 20:33
    미룬다는 것은 아직 여유가 있다는 뜻이다.
    라고 법륜스님이 말씀하시긴 했어요^^
    저도 원고지로 1,200장 글빚을 지고도 5개월간 일을 안했는데
    도저히 안되는 일정이 되니까 하고 앉았네요. 현 싯점.
    그리고 저 자신에게 당근을 좀 줬어요.
    7월 21일 몽블랑 가는 비행기표 예매. 23일간.
  • 4dr 2015.04.16 23:31
    역시 종교밥 먹는 분들은 하나마나한 소리를 잘 하죠.
  • 어진 2015.04.17 23:22
    감당하고 있으니 마음이 편하고
    감당할 수 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밤입니다.
  • sun 2015.04.17 14:11
    최근 인간극장 '이렇게 사니 좋지 아니한가'의 주인고인 권헌조어르신 가르침을 받았다고 합니다. 닳도록 보는 다큐가 '선돌마을 권씨부자전'이라는데 파일을 구하기는 힘듭니다. 반가워하실듯 글씁니다.
  • 4dr 2015.04.17 14:49
    권도현 씨네요. 반갑네요. <아버지의 집>이란 책에서 제일 마지막 연보를 정리하신 분이죠.
    참 좋은 분이십니다. 그냥 자체로 선한.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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