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8.12

"생각이 깊다는 것과 생각이 많다는 것은 다른 것이다"
10여년 전부터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간혹 사용하는 말이다.
이 말을 사용하는 경우는 열이면 열, 상대방이 생각이 많은 경우인데,
"당신은 생각이 많은 것이지 생각이 깊은 것은 아니다"는 지적을 위한 포석이다.

이 말은 고등학교 시절, 누이가 내 도시락 속에 넣어 둔 장문의 편지 속에 있던 말이다.
그때 집안과 제법 갈등을 겪는 힘겨운 터널을 걸어가던 나에게 누나는 한마디로
'야, 다 알아. 그만 해'
라는 한줄로 요약할 수 있는 말을 10여장의 리포트용지에 빼곡하게 적어 보냈다.
요즘 같으면 한줄의 글줄이 더 선연한데 한창 반항적인 동생을 설득할 필요가
있었던 시절에는 직진보다는 돌고 돌아 은유와 비유의 힘든 중문을 몇개나 통과해서,
동질감과 연대감을 슬쩍 보여주면서 결국은 질책에 이르는 방식을 사용한 것이다.
그 긴 편지글에서 여전히 내 머리 속에 남아 있는 한줄이 바로
"생각이 깊다는 것과 생각이 많다는 것은 다른 것이다"

생각이 깊은 사람을 만나기는 참 어렵다. 물론 주관적 잣대가 작용한다.
생각 많은 사람 보기는 참 쉽다. 세상 사람의 99%는 생각 많은 사람과 생각 없는 사람으로
나누어지기 때문이다.
당신 참 생각없다라고 말하면 관행적으로 욕이 되겠지만 생각 많은 사람보다
생각 없는 사람이 더 행복한 것 같다. 어쩌면 생각 없어 보이는 그 사람은 10분 만에 생각을
끝내고 10시간은 그냥 실행할 뿐이기 때문에 생각 없어 보일 수도 있다.
왜 직장이든 이전 시절 학교든 별 고민 하지 않는 것 같은데 뭔 일을 쉽게 쉽게 제대로 하는
사람들 있지 않은가.

생각 많은 사람은 그 사람의 생각 많음이 상대방에게 드러나고 항상 포착된다.
하여 사람들은 그 사람의 생각에 대해 경청해야 할 경우는 많이 생기지만 그 생각의 결과물을
보는 것은 아주 힘들다.
생각 깊은 사람은 항상 구체적인 결과물을 타인들에게 먼저 보여준다.
오히려 타인들의 머리 속에 '어떻게?'라는 생각을 심어 주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사람의 생각 자체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을 가능성이 아주 희박하며
그 사람 생각의 물리적 정신적 결과물을 먼저 보고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지만
이미 그의 뒷통수를 볼 뿐이다.

생각을 깊이하는 기능은 저마다 타고난 소질의 결과지만 로드맵 작성시
하기 싫은 일과 하고 싶은 일, 해서는 안되는 일과 해야할 일을
구분할 수 있는 냉정함을 필요로 하는 것 같다.
우리들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하고 싶은 일과 해야할 일을 의식적으로 일치시키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을 '자기 합리화' 라고 한다.
상대방의 이야기가 끝나기도 전에 나의 감성은 이미 판단을 해버렸고,
상대방의 이야기가 끝나면 어떻게 그 만큼의 데미지를 줄 것인가를 생각하느라 머리 속은 분주하다.
이것은 엄밀하게 따지고 보면 생각이 아니라 '반응'이다.
내 판단이나 사람들을 겪어 본 바로는 '생각 많은' 사람은 상황에 대한 자신의 반응을 생각의
결과라고 오인하는 경우가 많았다.

생각은 '구축'하는 조형물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생각은 평면에 칠해 나가는 페인팅은 아닌 것 같다.
몇가지 깊은 생각을 요구하는 시긴데 나는 그냥 생각이 많을 뿐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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