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8.29

*'청춘미술관'이라는 글들은 1995년에 목적을 가지고 작성된 글들이며
지금 보고 있자니 부끄러운 글들이나 그것이 숨길 수 없는 내 재주라는
생각에 수정 없이 그대로 올린다.
계속 서랍 속에 넣어두자니 글들에게 미안해서 이렇게 올리고 그 용도를
이제 폐기할까 한다.
밑그림이라는 소제목의 글들은 몇편 소개한 적도 있지만 실제는 하나의 그림을
정교하게 설명하는 목적을 가진 글이었던 기억을 되살려 지루하지만
그림에 대한 이야기까지 수록한다.


고독과 광기의 방 - 아를르의 침실


밑그림/ 나의 방

나는 그날 집으로 가고 싶었다.
거의 무조건적인 욕구가 나의 발걸음을 집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좀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나의 방으로 가고 싶었다. 내 방에서 잠을 자고 싶었고,
내 방에서 커피를 마시고 싶었다. 내 방에서 음악을 듣고 싶었다. 문제는...
내가 지금 있는 곳은 내 방으로부터 460km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보기 힘든 눈발까지 흩날리고 있었다. 시간과 돈을 가진 남자가 타지에서
들뜬 저녁을 보내기에는 적절한 날씨였다. 하지만 난 내 방으로 가고 싶었다.
벌써 몇 주일째 지겨운 곳에서 하기 싫은  일을 하고 있었다. 호텔이든, 여관이든,
지인의 집이든 간에 나는 이미 전전할대로 전전한 다음이었다.
양쪽 어깨엔 큼직한 검은 가방을 하나씩 매고 있었다. 하나는 옷가지였고,
하나는 워드프로세서였다. 그날은 짐의 무게가 평소보다 배는 더 나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커피숍에서 흩날리는 눈을 보면서 커피를 머금고 있던 나는 쇼파에 파묻힌 나를
끄집어 내었다. 택시를 잡아 타고 무조건 공항으로 향했다.
마지막 비행기를 타기에는 아슬아슬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나는 무조건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공항은 북적대었다. 연말의 묘한 흥분이 로비를 감싸고 있었다.
떠나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돌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것 같았다.
몇 사람 앞에서 표는 매진되었다. 주위엔 나와 비슷한 처지의 남녀들이 가방을 의자삼아
앉아서는 발장난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표가 없어서 더욱 즐거워진 사람들처럼 보였다.
역이나 버스터미널을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그곳은 지금 내가 있는 위치보다
위도가 높은 곳에 있었다. 난 1cm라도 내 방과 가까운 남쪽으로 내려가고 싶었다.
그날 나의 판단은 분명히 시종일관 착오와 비이성적 결정이라는 외길로만 치달았다.
대전으로 가기 위한 흥정을 끝내고나서 나는 택시에 몸을 실었다.
대전에서 기차를 잡아탈 요량이었다. 내가 타 본 가장 비싼 택시는 국도를 질주했다.
캄캄한 터널같은 국도를 감지할 수 없는 속도로 달려갔다. 굳이 국도를 고집한 나는
환각과 같은 침묵과 속도 속에서 절대로 내 방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라는 확신을
하고 있었다. 제천을 지나서 나는 멀리서 깜박이는 여관이라는 네온을 보았고 차를 세웠다.
기사아저씨는 대전엘 가야 손님을 태운다면 투덜거렸지만 약속한 돈을 다 지불하자 말없이 돌아갔다.
거의 모든 여관방이 그렇듯이 작은 탁자와 거울, 침대, 알맹이 없는 한 두개의 가구가 놓여 있는
그런 방이었다. 그런 배치가 눈안으로 들어오자 방은 갑자기 낮설어졌다.
샤워를 했다. 찬물로 하고 싶었다. 온몸을 바늘로 찌르는 듯한 짜릿함이 느껴졌고 몸은 곧
새파랗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젖은, 아니 얼은 몸에 그대로 이불을 감고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TV를 켰다. 곧 껐다. 다시 천장을 바라보았다.
나의 눈은 무언가 집중할 수 있는 대상을 찾고 있었지만 그럴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방안의 가구는 내겐 처음이었지만 수백번이나 보았던 그 방의 그 가구였고,
오히려 지겹다는 생각만 들었다. 여자를 청할까하고 한동안 생각했다. 포기했다. 불을 껐다.
시골여관의 암전은 정말 완벽한 흑색이었다. 하지만 그 흑색은 이내 사라지고 천정의
양쪽 모서리가 점점 나에게로 조여들어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치 방이 나를 조여들어오는 것 같은.... 나는 행여나 방이 나를 덮쳐올까 한시고 눈을
떼지않고 모서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눈이 아리해지도록.
불을 켰다. 나의 구닥다리 워드프로세스를 꺼냈다.
화면엔 지난 몇칠 동안 작업해 놓은 ‘말’들이 붙어있었다. 그 기계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작업은 말 뿐이었다. 자판을 하릴없이 두들겨대었다.
일기쓰기를 중단한지 그럭저럭 10년은 된 것 같았는데 나는 그때 일기를 적고 있었다.
10년간의 일들을 적고 있었다. 사이비 에즈라 파운드의 시가 화면 위를 날아 다녔다.
나의 머리속은 점점 명료해지고 있었다. 나는 마지막 일기를 쓰기로 했다. 유서였다.
그 방이 영화 <지옥의 묵시록> 첫 장면에 나왔던 사이공의 싸구려 호텔방과 같이 느껴졌다.
나는 영화에서 마틴 쉰이 취했던 것 같은 자세로 침대의 한 귀퉁이에 웅크리고 있었다.
유서는 마무리가 되질 않았다. 갑작스런 죽음의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별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어 자살을 생각했고, 자살의 동기를 찾지 못해
나는 다시 끙끙거리고 있었다. 최악의 시간들이 흘러갔다.
그때 그 방은 필사적으로 내가 벗어나야 할 골 깊은 함정과 같았고,
나는 내 방으로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젠 어둠속에서도 방안의 가구를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새벽이 오고 있었다.
나는 울고 있었다. 우스꽝스럽게도 스스로 설명할 수 없는 상황으로 나를 몰아놓고는
시골여관의 3층방  한귀퉁이 창가에서 스물 하고도 아홉해를 살아온 남자가 대책없이 울고 있었다.
그때 내가 필요로했던 것은 방이 아니라 단 하나면 족했을 사람, 바로 사람이었다.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고 나는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그 여관을 나섰다.
하품을 하고 있던 택시기사아저씨는 행선지를 말하는 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나는 어제 출발했던 그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지난 밤을 새운 그 방은
고독과 이상한 광기만 남기고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서울을 알리는 표지판이 멀리보였다.
나는 죽음으로부터 도망쳐 나왔다.



고호의 방

고호의 방을 보고 있다.
사람은 보이질 않는다.
지금 고호도 자신의 방을 보고 있다.
그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저 텅빈 침대에 온기를 불어 넣기 위해서,
이 침묵의 방에 사람소리를 기대하면서 그는 고갱에게 편지를 쓴다.
지금은 1888년 10월 어느날이다.

"...이 밖에 역시 방을 꾸미기 위해 나의 침실을 그린 30호 짜리 유화를 완성했습니다.
당신도 아시는 그 아무런 칠도 안 된 가구도 함께 그렸습니다.
마치 쇠라(Georges Seurat)의 그림처럼, 단순하고 아무것도 없는 이 실내를
그리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색면은 평탄하지만 커다란 터치로 듬뿍 칠해져 있습니다.
벽은 엷은 보라색, 바닥은 퇴색한 듯한 거친 적갈색, 의자와 침대는 크롬엘로우,
배개와 욧잇은 엷은 녹색이 도는 레몬빛, 담요는 피빛같은 빨강,
화장테이블은 주황, 세면기는 파랑, 창틀은 초록입니다.
저는 보시다시피 이들 갖가지 색깔에 의해 절대적인 휴식(평화)을 표현하려 하였습니다.
흰부분이라고는 검은 테두리에 싸인 거울의 면뿐입니다.
당신이 오시면 이 작품도 다른 것과 함께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두루 이야기하십시다.
왜냐하면, 저는 마치 몽유병환자 처럼 일을 하고 있어서,
때때로 저 자신 무엇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동생 테오와 위에 인용된 고갱에게 보낸 편지, 그 1년 뒤 헤이그에 있는
누이 동생 빌에게 써 보낸 편지에서도 모두 이 그림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아를르의 침실>이 바로 그 작품이다.
고호는 이 그림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뒷 날 생 레미(Saint Remy)에서 요양을 하고 있던 시기에 두점의 모사품을 만들어 내었다.
현재 파리의 인상파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작품은 그 모사작품 중 하나로 추측된다.
자, 어쨌든 고호의 방을 좀 살펴보자.
그림은 단순한 실내를 묘사하고 있다. 눈에 보이는 기물들을 나열해보면, 노란침대, 의자,
배개, 요, 붉은담요, 마루바닥, 삼면의 벽, 자화상으로 보이는 그림을 포함한 그 벽에 걸려진
5점의 액자, 옷걸이와 옷, 테이블, 세면기, 물병 따위, 약간 열려진 창문, 좌우의 문, 거울,
작업치마 또는 수건 형태의 천종류, 이것이 이 그림에 등장하고 있는 모든 것의 목록이다.
맨 앞의 인용문에서도 보이지만 고호는 휴식(평화)을 표현하려고 했다. 하지만 감상자들의
보편적인 판단은 고호의 의도를 존중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듯 싶다.
무엇보다 이 그림은 불안정하다. 그것은 휴식이나 평화라는 용어를 빗겨가는 의미를 지닌 말이다.
안정적임에도 불구하고 색채는 조용한 부조화를 이루고 있고 그로서는 완화된 터치임에도
불구하고 필촉은 아무래도 뼈를 드러내고 있다. 뚜렷한 검은색에 의한 기물의 외곽선 묘사는
고호 특유의 꿈틀거림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 지극히 일상적 소도구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분명치않은 것이 하나도 없는 반면에 현실적인 실재감을 가진 것 또한 없다.
시점과 구도, 배치, 도학적 측면에서 이 그림을 분석해 들어가면 보다 이런 심증은 굳어진다.
여러분들이 지금 이 그림에 등장한 기물과 구조물들의 무게중심을 임의적으로 설정해보려고
시도한다면 그것이 거의 불가능한다는 것을 곧 알게 될 것이다. 모든 기물과 구조물들은
하나의 기준선과 시점에 의해 배치되어 있지않고 조금씩 흐트러져 있다.
정면으로 보이는 안쪽 벽은 원근법의 원리에 따라 작게 그린 것이지만 실내라는 사실을
상기할 때 지나치게 멀리있다. 그것은 침대의 머리와 우리 쪽으로 향해 있는 앞면의 면적을
비교해봐도 이 방의 길이가 엄청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두 개의 의자 또한 마찬가지다.
하지만 안쪽에서부터 시선을 거두어 들어오면 상황은 달라진다.
왼쪽의 수건이 걸려 있는 벽은 굉장히 좁다. 그리고 바로 문으로 이어진다.
앞 쪽의 의자는 바로 그 문앞에 놓여있다. 그 거리가 짧다.
침대머리와 안쪽 벽 사이에 어느정도 거리가 느껴진다. 안쪽의 의자는 바로 벽앞에 놓여있다.
그리고 침대는 그 의자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다. 의자와 침대와의 관계를 따져보면
침대와 안쪽 벽사이에 거의 거리는 없다.
바닥은 어떠한가? 오른쪽 앞부분을 보면 마루의 중앙에서 연상되는 기울기보다 윗쪽으로 솟아 있다.
더구나 양쪽의 문은 닫힌 것 같기도 하고 조금 열려진 것 같기도 하고...
결국 이 그림은 기물과 기물 사이의 관계들이 모순투성이다.
고호의 방에 걸려 있는 거울은 아무런 기능을 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마주보이는 것을 담아내는 것을 거부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의심을 하기 시작하자 고호의 방은 애초와는 다르게 믿지 못할 비현실의 실내로 보이는데,
그런 느낌을 확인시켜주듯이 명암에 의한 그림자는 이 그림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환각적 분위기는 한층 더 한 것이다.
고호 자신의 편지에 나타난 것 처럼 이 방은 몽유병환자가 그린
백일몽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이것이 고호의 방이다. 가장 열렬했던 아를르시대의
그의 침대인 것이다. 고호는 왜 이 그림을, 이 방을 그린 것일까?



단 한사람, 고갱을 기다리며

고호는 고갱을 기다리고 있었다.
1888년 아를르에 도착한 고호는 파리의 친구들을 아를르로 불러들여야겠다는 꿈을
가지게 되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아를르는 완벽한 조건을 갖추고 있는 작업의 천국으로
여겨졌다. 사실 아를르의 햇볕은 고호의 생각을 그렇게 만들고도 남을 만큼 풍부했다.
문제는 그것이 그의 판단이었고, 그의 감동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고호만의 꿈일 수밖에 없었다. 왜 우리도 그런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스스로 도취되어 이야기했는데 주위의 반응이 없을 때...
하지만 고호는 우리들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이해하기 보다 이해 받기를 원했던 타입이었다.
그가 비현실적일 수밖에 없었던 특색이었다.
어쨌든 그는 ‘남프랑스의 아틀리에’로 친구들을 초청했다.
편지를 보냈지만 공허한 메아리였다. 단 한사람 고갱을 제외하고는...
자연히 고갱이 아를르로 오는 것은 당시 고호 최대의 열망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아를르의 꿈'을 이룰 수 있는 단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에서 이 작품을 관찰해 보면 몇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아를르의 여인-지누부인>이라는 그림과 함께 이 그림은 고호의 작품 중에서도
평탄한 붓질과 색면처리, 굵은 테를 사용한 방식을 보여 주고 있다.
또한 인상파의 전형적인 색채론과는 약간 궤를 달리하고 있다.
음영이 없는 평평한 색면 처리는 인상파의 점묘적 기법에 의한 색채분할 이론에
대한 반발이다. 고갱은 인상파의 색채분할론에 심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고,
이런 고갱의 생각은 고호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것은 색채가 단순히 빛에
의해 발생된 외부세계를 재현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적
심리상태를 표현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사고로의 변화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파랑이나 빨강에 의해 인간의 무서운 정념을 표현하고 싶다"
"두 여인들의 사랑을 두 가지 보색의 조합에 의해서 표현하는 일"
"색채는 열렬한 기질을 가진 어떤 종류의 감동을 암시한다"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에 나타난 고호의 이런 생각들은 고갱과 거의 일치하는,
고갱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견해인 것이다.
1888년 10월 23일. 고갱은 아를르에 도착했다. 이 그림은 결국 그 직전에 그려진 것이데,
이 그림의 스케치를 동봉한 편지는 결국 ‘아를르의 꿈’을 이루기 위해 고갱을 갈망한
고호의 마음이었다.
<아를르의 침실>은 고갱과 함께 생활할 바로 그 방이며, 고갱에게 그 방을 미리
보여주려는 고호의 안간힘이었다.
고갱의 회화론(색채론)을 적용하면서까지(물론 고호도 동의했지만) 그는 열렬히
그를 초대한 것이다. 고호의 설명, 휴식과 평화를 표현하고 싶었다는 말과는 다르게
이 작품은 불안스러운 분위기를 풍긴다. 그것은  조바심에 의한 고호의 흥분상태
때문일 것이다.
그는 이미 정상적인 정신상태가 아니었다. <아를르의 침실>은 고호 자신이었다.



귀를 자르다

고호와 고갱의 아를르 시대는 이렇게 고호의 바램과 설득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러나 기대는 실현에 대해 등 돌리기 일쑤였다. 그들은 애초부터 함께 살기엔
너무 이질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고갱은 대단한 고집불통의 사나이다.
직선적이며 외향적이고 자신만만하다. 고호의 고집은 내면을 지향했다.
한 남자는 끊임없이 상대방의 행동과 말에 대해, 특히 자신에 대한 상대방의
평가에 대해 병적인 집착과 조바심을 나타내고, 그 상대방은 쉽게, 너무 쉽게
상대방을 평가하고 곧 무관심해지고 자기 길을 가버리는 남자.
고호는 지나치게 열망했고 고갱은 지나치게 자신만만했다. 작은 다툼은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일어났고, 갈등의 골은 깊어갔다. 그것을 예상하지 못한 사람은 아마도
두 사람뿐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고호 혼자였을지도 모르고...
1888년 12월 24일 저녁은 두 사람의 평행선이 끝나고 뫼비우스의 띠로 변화된 날이었다.
고갱은 태연하게 저녁을 먹었고 밤공기를 마시러 산책을 떠났다.
고호의 정신상태는 고갱에 대한 애증으로 팽팽할대로 팽팽해진 고무줄과 같았다.
고갱이 광장을 가로지르고 있을 때 면도칼을 손에 쥔 사나이가 뒤를 따르고 있었다.
이글거리는 눈빛만 남은 고호였다. 인기척을 느낀 고갱은 뒤돌아 보았다.
그 위압적인 시선에 고호는 고개를 떨구고 뒤돌아 섰다.
고갱은 그날 밤 <아를르의 침실>이 아닌 바깥의 여관에서 밤을 보냈다.
아를르의 침실에 도착한 고호는 모든 것을 거부하도록 그려진 바로 그 거울 앞에 섰다.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았다. 손에는 아직도 면도칼이 들려져 있었다.
다른 손으로 귀를 잡았다. 고호의 왼쪽 귀는 잘려져 나갔다.
그는 멍하니 거울을 보다가 본능적으로 출혈을 막기 위해 수건으로 머리를
칭칭 동여매었다. 베레모를 그 위에 눌러 썼다. 잘려진 왼쪽 귀를 깨끗이 씻었다.
종이에 조심스럽게 싼 다음 거리로 나섰다.
몽유병환자와 같은 상태에서 그는 라셀이라는 창녀가 있는 집을 향해 걸었다.
종이에 싼 귀를 라셀에게 건네 주고 고호는 <아를르의 침실>로 돌아왔다.
다음날 아침, 경찰이 도착했을 때, 그는 거의 죽어 있는 상태였다.
고호는 끝내 그의 방에 혼자 남은 것이다. 고호의 방은 다시 텅비었다.
머리에 붕대를 두르고 그는 저 의자에 앉아 창밖을 멍하니 보았을 것이다.
그때 그는 그의 방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었을 것이다. 고갱은 파리로 떠났다.
고호의 '남프랑스의 아틀리에', '아를르의 꿈'은 이렇게 끝이 났다.
<고갱의 의자>라는 작품이 있다. 고갱은 두 달의 아를르 생활 동안 몇점의
고호를 남기고 있었다. 고호는 이상하게도 고갱을 한번도 그리지 않았다.
'귀' 사건이 일어나기 몇일전 고호는 <고갱의 의자>라는 작품을 그렸다.
덩그라니 고갱이 사용하던 의자만을 그린 것이다. 고갱의 책 몇 권이 의자
위에 놓여 있었고, 불을 밝힌 초를 그 위에 올려 놓은...

비평가 올리에(Albert Ollier)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이 그림은 고갱의
부재를 그린 것이다. 고호의 마음에서 고갱은 이미 떠나있었던 것이다.
아니 고갱이 고호의 마음에서 떠나 있었던 것이다. <아를르의 침실>은 그 많은
고호의 자화상 중 하나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총소리-다시는 방으로 돌아가지 않으리

고호는 서른 일곱해를 살았다. 그 짧은 생애 동안 작업에 몰두한 시간은 10년 정도이다.
1844년(?) 네덜란드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화상, 점원, 전도사 등의 직업을
전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네덜란드에서의 작업 이후 그는 1886년 부터 프랑스에서 활동했고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파리(1886-88), 오를르(1888-90), 오베르 쉬즈 오아즈(1890). 5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는
후기 인상파의 주요한 한 사람이 되었고 그만의 독특한 회화세계를 만들어 나갔다.
건강회복을 겸한 아를르에서의 2년은 가장 왕성한 창작력을 보인 시기였다.
고갱과의 비극적인 결별 이후 고호는 근 1년 동안을 생 레미의 정신병원에서 지냈다.
그는 정신적 평형감각을 잃었다. 동생 테오의 지극한 보살핌이 없었다면
그의 생은 훨씬 단축되었을 것이다. 생 레미에서도 작업을 진행했던 고호가 요양을
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작업 중 그는 항상 팽팽한 긴장속에 빠져 있었다.
오히려 그런 상황에서 남긴 작품들이 더 정교한 표현력을 보이기도 했다.

<까마귀떼가 날으는 밀밭>을 그리면서 그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
즉 전원 속에서 내가 볼 수 있는 건강과 회복력’을 표현하려고 했다. 그는 자신의
희망과 내면의 고독과 광기를 우리에게 일치시켜 보여주지 못했다. 이 작품을 보고
고호의 의도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듯 싶다. 오히려 같은 편지속에
휘갈겨 쓴 '슬픔과 극도의 고독'이 느껴질 뿐이다.
그를 마지막으로 돌봐주었던 오베르의 의사 가세(Gachet)의 노력과 테오의 사랑도
그의 고독과 광기를 치유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그는 단 한번도 안락한 그의 방을 가져보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아니 가질 수 없었다. 그의 몸은 많은 방들에서 휴식을 취했지만, 그의 영혼과
너무 강렬한 자의식은 쉴 곳을 찾지 못했다. 그는 다시는 방으로 돌아가지 않기로
작정했다. 영혼의 휴식은 육신을 포기할 때에만 가능한 것일까? 진정한 고호의 방은
현실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것이었을까? 그럴지도 모른다. 백년전이나 지금이나
고독한 영혼들의 안식처, 우리들의 방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1890년 7월, 그는 오베르 언덕위에서 권총으로 자살을 기도한다.
몇칠 뒤 그는 자신의 그림속으로 날아갔다. 그해 고갱은 타히티로 향했다.
고갱의 항해는 1890년에 새롭게 시작되었지만, 고호의 항해는 1890년에 닻을
내려버린 것이다. 하지만 나는 꿈꾼다. 풍부한 햇살에 눈을 뜬 고호가 바로
저 침대에서 일어나는 모습을. 그리고 고독과 광기에 지친 밤을 털어내면서 다시
저 창문을 여는 모습을.



작품; 아를르의 침실
작가; 고호(Vincent Van Gogh 1853-1890)
재료; 유채/캔버스
크기; 73 X 91.5cm
제작; 1888
소장; 시카고 미술연구소 미술관

1888년에 제작된 고호의 작품 <아를르의 침실>은 캔버스 위에 유화로 그려졌다.
크기는 73X91.5센티미터이다. 두 점의 모작이 있다. 이 작품은 맨 처음 그려진 작품이다.
현재 시카고 미술연구소 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

4dr@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