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8.29

*'청춘미술관'이라는 글들은 1995년에 목적을 가지고 작성된 글들이며
지금 보고 있자니 부끄러운 글들이나 그것이 숨길 수 없는 내 재주라는
생각에 수정 없이 그대로 올린다.
계속 서랍 속에 넣어두자니 글들에게 미안해서 이렇게 올리고 그 용도를
이제 폐기할까 한다.
밑그림이라는 소제목의 글들은 몇편 소개한 적도 있지만 실제는 하나의 그림을
정교하게 설명하는 목적을 가진 글이었던 기억을 되살려 지루하지만
그림에 대한 이야기까지 수록한다.

화가의 눈, 증언으로서의 미술 - 1808년 5월 3일


밑그림/ 폭력이라는 우상

폭력 앞에 마주 선다는 것. 그것은 언제나 두려움이다.
피할 수 없는 상황일때, 우린 마른 침을 삼키며 목젖이 팔딱거리는
엄청난 맥박을 느낄 수 있다. 대항할 것인지, 그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기다릴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국민학교를 입학하기 전, 형은 아마 4, 5학년 쯤이었을 것이다.
여름이었는데 한바탕 소나기가 지나간 시원한 해질녘이었다.
진흙탕 골목길을 걸어올라오다 우린 까까머리 중학생 몇명에게 포위 당했다.
지금은 기억할 수 없지만 전주곡에 불과한 몇 마디 욕설이 오갔고 주먹과 발길질이
가해졌다. 형은 끝까지 대항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고 우리는 흠씬 두들겨 맞았다.
나는 형의 손을 꼭 쥐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형이 계속 우는 이유를 알지 못했었다.
아마도 형은 동생을 지키지 못한 분함과 수치심에 그랬던 것 같다.
나이를 먹으면서 주먹이 아파서 우는 일은 거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비교적 싸움이라는 것과는 거리가 먼 아이였다. 하지만 사춘기 시절의
폭력이라는 것은 역시 누구에게나 한번은 생기는 일인가보다. 나는 유난히 공부를
못해서 뺑뺑이 돌리는 고등학교 시험엘 떨어지고 재수를 했다.
이듬해 고등학교라는델 입학했는데, 나는 상급생들에게 좀 뻣뻣했다.
학교 옆 골목으로 끌려갔고 6,7명의 검은 교복들에 둘러싸여 무릅을 꿇은 채
아주 '질서'있게 폭행을 당했다. 난 이빨을 앙다물고 날아오는 주먹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 상태가 한동안 계속되었고 내 얼굴은 피로 얼룩지기 시작했다.
내 눈매가 좀 캥겼는지 그들 중 한 명이 말리면서 집단폭행은 끝이 났다.
나는 그날로 머리를 빡빡밀어버렸고 다음날부터 말렸던 녀석부터 한놈씩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보복, 또 보복, 또.... 난 결국 그 학교를 한달만에 그만두었다.
그것은 유치한 치기가 만들어 낸 그 나이 또래의 폭력이었다.
대학에서 난 이제까지 체험했던 폭력과는 다른 질의 폭력을 만날 수 있었다.
미식축구팀이 있었다. 팀웍을 다지는 구호는 그 육중해 보이는 유니폼과 몸매 때문에
우리 같이 옷감 적게 드는 사나이들에겐 짐승소리 같이 들리곤 했는데,
운동을 끝마치고 샤워장에서 나오는 그들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우린 파안대소했다.
옷을 벗은 그들의 고기는 우리와 같은 몰골이었다. 유니폼과 규율을 가진 집단은
그렇게 위압적으로 보였던 것이다.
'권력'과 마주 섰을 때, 우선 우리 앞에 나타난 폭력의 실체는 바로 이 유니폼과 규율로
무장한 '군대'였다. 철망으로 가려진 그들의 얼굴은 표정을 보여주지 않았고 국방색에
대한 뿌리 깊은 두려움은 막상 거리로 나선 우리들의 가장 현실적인 적이었다.
하지만 인간은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그 폭력에 맞서왔다.
시위를 하다 명동성당 앞에서 사로혔다. 이른바 '닭장차' 안에서 나는 군홧발과 곤봉에
찢밟히고 찍히고 있었다. 그때 나는 고통이나 두려움보다는 이 시간만 넘기면 조서를
꾸미고 몇대의 뺨을 맞고, 몇일 후면 훈방 될 것이라는 미래형 화면만 생각하고 있었다.
미처 그 부당한 폭력에 분노할 여유 조차 없었던 것이다.

1987년 말, 어느날인가 나는 한 밤중의 골목길에서 도망치고 있었다.
앞뒤에서 마주 달려오는 형사들을 보았을 때, 나는 뜀박질을 멈추었다.
나는 그 골목을 빠져나갈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도 그들은 내가 저항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가쁜 숨으로 달려와서는 옆차기와 주먹세례를 퍼부었다. 수갑이 채워졌을 때
나는 아랫도리에서부터 맥이 빠져나갔다. 수갑은 ‘불법’을 감금한 '합법'이었다.
들고 있던 스프레이와 유인물을 떨구었다. 그때 난 모든 신분증과 자필의 흔적을
이미 남겨놓고 나왔는데도 내 몸에 혹시 나의 부주의로 남아 있을지도 모를 전화번호와
이름이 없을까라는 걱정으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그때 난 그 어둑한 골목길에서 두려웠다. 밝은 대낮 한길이었으면 구호라도 외치면서
잡혀갔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두컴컴한 그 골목길에서 난 두려웠다.
그러나 당시 나의 두려움이라는 것도 죽음을 눈 앞에 둔 상황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김근태라는 석자의 이름을 많은 사람들은 알고 있다.
그는 극히 희박한 확률의 '승리'를 일구어 낸 사람이기 때문이다.
권력에 의한 폭력 앞에서 그를 가장 절망스럽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존재의 가치'에
대한 회의감이었다. ‘그들’ 앞에 발가벗기워져 초라하게 섰을 때,
죽음에 대한 두려움 보다 먼저 엄습한 것은 수치심이었다.
인간은 그것 때문에 자살할 수 있는 유일한 생명체가 아닌가.
명백한 불의에 애원할 수 있는 경우는 단 한가지 이유뿐이다. 목숨을 담보로 한 순간이다.
"너 한놈 정도는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수 있어!"
죽음 앞에 선 시한부 인생의 마지막 갈등을 겪어 본 사람 만이 알 것이다.
존재가치를 내팽겨치고 삶을 구걸할 것인가, 죽음이라는 댓가를 치르고 살아있었던 시간의
가치를 지킬 것인가...
80년대 내내 난 힘들 때 마다 1980년 5월의 광주도청을 생각했다.
그 마지막 밤을 지키고 서 있었던 고등학생을 생각했다.
권력에 의한 폭력은 강력하다. 그것이 합법이라는 이름의 폭력으로 개인과 사회의
의지를 짓밟아 올 때, 과도한 목적의 눈빛만 번뜩이는 살의를 드러낼 때,
그것은 가장 강력한 두려움이다. 난 묻고 싶다. 권력에 의한 폭력이라는
우상에게 묻고 싶다. 사람과 삶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객관이다.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았던 권력에 의한 폭력의 외피는 이데올로기였다.
그것은 관념이다. 내가 묻고 싶은 것은 바로 이들의 관계이다.
"존재가 관념에게 애원하는 것이'합법적'입니까?"
그 대답을 나는 꼭 듣고 싶다.



한장의 보도사진-총구를 바라보는 눈

여기에 죽음 앞에 마주 선 사람들의 모습이 있다.
화면은 침묵에 휩싸여 있다. 정지해 있다. 아마 그것은 순간이었을 것이다.
밤새도록 쉼없이 살인은 진행되었다. 총구의 열이 식을 새도 없이 진행되었다.
총소리, 고통, 인간의 두려움 따위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이 한 장의 스틸사진 처럼 포착되었을 때, 그 순간은 영원히 남겨질 것이다.
마치 유태인들의 다짐처럼. '용서하자. 그러나 잊지말자!'
고야(Francisco Jose de Goya y Lucientes)는 1808년 5월 3일 밤의 한 순간을 한 장의
보도사진 처럼 180년이 경과한 지금,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다. 화면을 조절하는 시각적
중심은 흰셔츠를 입고 두 손을 번쩍 들고 있는 갈색머리(밤과 조명의 관계를 추측할 때)의
사나이다. 하지만 한번 더 화면을 보면 중앙 우측 땅바닥에 놓인 칸델라 불빛이
이 작품의 전체적인 구도와 분위기를 조율하고 있다.
불빛이 비추이고 있는 쪽, 즉 명부에는 전날 밤 5월 2일 봉기에 가담했던 마드리드 시민들이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앞에서 이미 언급한 흰셔츠의 사나이는 저항의 상징이 아니라
죽음 앞에 마주 선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나타내고 있다.
그가 마지막으로 '스페인 만세'를 외쳤는지, 총의 명령 앞에 반사적으로 팔을 치켜든 것인지는
섣불리 판단할 수 없다.
화면 하단엔 이미 앞서 죽은이들의 피로 얼룩진 그들 고향 땅이 있다.
얼굴을 옆으로 하고 땅에 누운  사나이는 이미 총살 이전에 폭력이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약간 벌린 입과 넓은 이마는 왠지 그가 생전에 선한 삶을 살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 죽음 바로 뒤엔 마치 분노와 두려움으로 몸을 떠는 듯한 사나이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있다.
이 사나이는 틀림없이 '스페인 만세'를 외치고 죽을 것이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사람들, 손을 깨물고 자신에게 닥칠 죽음을 훔쳐보는 사람,
칸델라 불빛은 그들의 꾸밈이 있을 수 없는 마지막 동작을 비추고 있다.
죽음의 순서를 이렇게 대책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게 만든 것은 권력이다.
역사 이래 권력이라는 이름의 폭력은 이런 풍경을 무시로 강요해왔다.
불빛의 반대편은 가해자들이다. 학살의 대리인들이다. 7,8명으로 보이는 이 군인들은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고 있고 동일한 동작을 취하고 있다. 대검을 꼿은 총은 가지런하고
거기엔 실수의 가능성이 보이질 않는다. 보이진 않지만 아마도 무표정하고 지친 얼굴일
것이다. 거의 흑색에 가까운 암갈색으로 처리 된 배경은 밤하늘이고 그 하늘은 생존을
암시하는 단 한줄기의 빛도 보여주지 않고 있다. 이때 고야가 표현한 이 암흑의 배경은
이 학살의 부당함을 암시하는 부정과 은폐, 침묵과 불안의 어둠이다. 어스름하게 보이는
저 건물은 피오왕자의 저택일까? 아니면 마드리드의 어느 건물일까?
왕자의 저택 앞이라면 카를로스 왕가의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시민들이 죽어가고 있는
바로 지금,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이 한장의 보도사진 같은 그림을 덮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탕'하는 한발의 총성을
듣게 될 것이다. 허급지급 다시 화집을 펼쳤을 땐, 이미 땅에 누워버린 흰셔츠의 사나이,
바로 그이의 뒷통수를 볼 수 있을 것이다.



5월 2일과 5월 3일

우리는 이 학살의 배경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1808년 나폴레옹 군대는 마드리드를 점령했다. 나폴레옹은 그것을 혁명의 전파라고 말했지만
피해자들의 입장에서 그것은 침략이었다. 보수적이고 권위적이고, 무엇보다 착취자였던
카를로스 왕가는 붕괴했지만 고야는 이 새로운 정복자가 자신이 열망했던 자유주의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폴레옹 군대가 보여준 것은 야만적 만행이었다.
마드리드 시민들은 카를로스 왕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침략자의 만행에 분노했다.
6년간의 독립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그것은 전 유럽적인 전쟁의 한 부분이기도 했다.
5월 2일 시민들은 마드리드의 푸에르타 델 솔(Puerto del Sol) 광장에서 나폴레옹의
모로코 용병들에게 거의 맨손으로 저항했다. 언덕 위에서 병사들이 발포했고 뮤라 장군은
결국 기병대에 진압명령을 내렸다. 체포된 시민들은 마드리드 동부의 언덕에서
5월 3일 밤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처형당했다.
  <1808년 5월 2일-이하, 5월 2일>과
<1808년 5월 3일-이하, 5월 3일>, 이 두 작품은 바로 이런 역사적 이틀을 소재로 하고 있다.
1814년 2월 나폴레옹의 군대는 물러갔지만 비극의 역사는 영원할 수밖에 없다.
고야는 이 대목에서 증언자이기를 자청하고 나섰다. 궁정화가이면서도 천한 것들을
그린 화가였고, 권력자들의 얼굴을 그리면서도 그들의 입을 비뚤어지게 그렸던 고야가
아니었던가.
고야는 당시 임시정부에 이 작품을 그리겠다고 자청했다.
"유럽의 폭군에게 대항한 우리들의 영광스러운 반란의 가장 눈부시고 가장 영웅적인
행동을 화필로써 영원히 전할 기회를 주었으면 한다"
그의 청원은 수락되었고 1500레알스의 돈을 받은 고야는 즉시 제작에 들어갔다.
<5월 2일>은 용병을 나타내는 터어번을 한 나폴레옹 군대에 대항하는 시민군을
그리고 있다. 화면은 무겁고 뚜렸한 빛의 흐름은 없다.
<5월 3일>에 비하면 분명히 한단계 처지는 작품이다.
말들은 격렬한 포우즈를 취하고 있지만 어딘지 뻣뻣하고 저항하는 시민군들의 모습도
하나의 포우즈처럼 느껴진다. 뒤엉켜 있는 군상은 고전적 명작들에 비해 그 구성력이 떨어진다.
<5월 3일>은 두말할 나위 없는 걸작이다.
신화와 역사적 전쟁을 소재로 한 이런 류의 작품 중에서 이 작품처럼 격렬한 현장성과
진실성을 가진 작품은 없었다. 다비드, 루벤스, 푸생, 들라크로와의 시도와는 뚜렷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고야는 아마도 사건현장에 있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마치 바로 옆에서 그것의 전 과정을 훔쳐 본 사람처럼 그려내고 있다.
마치 생생한 기록사진 처럼. 고야의 눈은 마치 감성을 가진 카메라렌즈와 같이 작동했다.
이 작품을 볼 때 마다 나는 인도양과 아시아 대륙을 건너, 200여년 이라는 시간을 터널을
지난 1980년대의 한 남한 시인을 떠 올린다. 이 시인도 마치 자신의 눈으로 본 것 처럼
증언하고 있다.

밤12시 나는 보았다
경찰이 전투경찰로 교체되는 것을
밤12시 나는 보았다
전투경찰이 군인으로 대체되는 것을
....
밤12시 나는 보았다
총검으로 무장한 일단의 군인들을
....
밤12시
도시는 벌집으로 쑤셔놓은 심장이었다
밤12
거리는 용암처럼 흐르는 피의 강이었다
밤12시
바람은 살해된 처녀의 피묻은 머리카락을 날리고
밤12시
밤은 총알처럼 튀어나온 아이의 눈동자를 파먹고
밤12시
학살자들은 끊임없이 어디론가 시체의 산을 옮기고 있었다
....

- 김남주 학살2 중에서-

"나는 보았다"
이 말보다 학살자들에게 위협적인 발언은 없다.
고야는 나는 보았다라고 또렷하게 말하고 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학살은 학살이고, 진실은 진실이어야 한다.
역사의 평가에 맡기자는 따위의 발상은 애시당초 불순하다.
그래서 고야는 본대로 들은 대로 알고 있는 대로 증언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증언 자체에 비중을 둔, 그러나 탁월한 예술작품으로 승화된 예는 거의 없었다.
고야는 자유주의를 신봉했다. 그것은 인간을 존중하는 이념이었는데
이 비인간적 상황에 대해 그는 진실로 분노했다.
1792년 이후 그는 청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5월 3일>에서 그가 마치 그 밤하늘의 공기까지 본 듯이, 그 불길하고 음습한 산소를
마신것 처럼 시각적으로 빗어낼 수 있었던 것은, 들을 수 없다는 신체적 조건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들을 수 없는 소리를 보충하는 방법은 시각적 경험과
상상력일 것이다. 아우성과 비명에 대한 기억을 찾아내어서 상상했고, 화면에서
그 소리가 새어나올 수 있도록 표현했다. 베에토벤이 <전원교향곡>을 청력을 완전히
상실한 시기에 작곡할 수 있었던 그 기억과 소리에 대한 갈망의 힘으로 말이다.
제복을 입은 병사들의 질서와 금속성 총신의 반복은 쓰러지는 시민들의 불규칙성과
대비되었고, 그 희생자들은 그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한,
반복할 수 없는 동작을 보여주고 있다. 흰셔츠의 사나이가 발화점처럼 타오르고
있지만 주위 사람들 또한 화면상의 부주제에 머무르고 있지는 않다.
거칠게 휘갈긴 듯한 필법은 그 주제방향과 일치하고 있으며 그 붓질의 힘은 고야의
분노를 사회적 분오로 승화시키고 있다.
붓질의 비공식성(전통적 기법은 거의 공식에 가깝다)은 기존의 회화가 지니고 있었던
공식성에 대한 저항이었다. 사회적 분노가 저항이었듯이 말이다.



귀머거리 화가 고야

푸엔데토도스는 스페인에서도 지형이 험악한 지방이다.
자연의 아름다움 보다는 메마르고 황량한 잔혹함이 느껴지는 땅이었다.
1746년 3월 30일 고야는 바로 이 땅에서 가난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1760년 고야는 가족들과 함께 사라고사 시로 거처를 옮겼다.
에스쿠엘라 피아 델 파드레호아킨 학교에 입학한 것도 이때였다.
호세루산(Jose Luzan)의 공방에서 뎃생과 유화를 공부하면서 그는 그림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여놓는다.
마드리드의 산페르난도 아카데미에 두 차례 시험을 치르지만 낙방했다.
1770년에 이르러서야 그는 이탈리아의 파르마 아카데미에 차석으로 입학했다.
그후 고야는 왕실 타피스트리(주) 공장에서 밑그림을 그리는 일을 하였다.
이것은 그에게 화가로서 입신할 수 있었던 최초의 기회였다.
1780년대에 그는 자유론자로 변모해 있었다. 정형화된 절대적 미술의 권위에 대한
반항감이 그 촉매제 역할을 했다. 그는 벨라스케스와 렘브란트를 탐닉했고,
자연과 함께 그들을 스승으로 삼았다.
1786년 그는 마침내 궁정화가로 임명되었다.
타피스트리를 위한 세속풍의 밑그림과 왕족과 귀족들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 그의 작업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 시기까지 그는 방탕했고 놀기를 좋아했다. 이탈리아에서 수도원의
수녀를 유혹했다는 죄목으로 사형될 뻔 했는데, 속임수를 써서 도망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것은 후세 사람들이 지어낸 것 같은데, 이런 이야기를 지어낼 정도로 그는 방탕했다.
40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그의 인생에는 어둠이 깃들기 시작했다.
젊은 시절 방탕의 댓가로 고야는 1792년 심한 병을 앓았고 청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완전히 절벽같은 귀머거리가 된 것이다. 그때 까지 오직 외부적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그는 서서히 인간의 내부로 관심을 이동하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신체적 불구라는 형벌은
그의 예술을 한층 깊이있고 영구한 것으로 만들었다. 청력을 상실한 이후의 작품이 없는
고야는 탁월한 한 사람의 궁정화가 또는 풍속화가에 불과했을 것이다.

나폴레옹 군대가 마드리드를 점령했을 때 고야는 그것에 대해 호의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궁정화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유주의의 신봉자였다. 그는 새로운 통치자들과 친밀하게 지냈다.
그러나 본성적으로 그는 왕가, 승려, 병사, 관료 따위의 용어들과 화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곧 나폴레옹의 혁명이라는 것에 대해 회의했고 그 순간부터 나폴레옹 군대는 침략군이었다.
그는 자신의 후원자들인 왕과 후원자들에 대해 무조건적인 감사를 표하는 화가가 아니었다.
그는 그들의 허위와 위선 그리고 그 아래서 고통 받는 민중들의 모습을 항상 생각하고 있었다.
어쩌면 궁정화가라는 그의 직분을 생각하면 이해되지 않는 한 단면이었다.
고야의 위대성은 지배와 피지배, 억압과 자유의 객관적 진실을 포착하려는
증언자적 자세에 기인한다. 그는 현실적인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는데 작업의 중심을
두고 있지 않았다. 궁정과 권력자들의 화려함은 스페인의 비극 위에 세워진
모래성이었기 때문이다.

1819년 그는 다시 중병에 걸렸고 마드리드 교외의 만사나레스 강변에 <귀머거리의 집>이라는
별장에서 1923년 까지 은폐된 생활을 한다. 이 시기에 남긴 작품이 이른바 <검은그림> 14점이다.
그는 인간의 본성을 꿰뚫어 보려는 악마적 생명력을 가진 작품들을 남겼다.
그는 인간의 비극에 집착하고 있었다.
1820년대 초 나폴레옹 군대는 떠났지만 페르디나드 7세의 폭정이 스페인을 누르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스페인을 떠났다. 1824년 6월 고야는 결국 자유주의를 찾아 고국을 등지고
프랑스로 떠난다. 일시 귀국했을 때 페르디난드 7세는 그가 계속 궁정화가로 일할 것을
권유했으나 전제정치를 거절하고 다시 프랑스의 보르도로 떠났다.
80세의 고야는 레오카디아 로자리오를 새 아내로 맞이했다.
1828년 고야는 망명지 보르도에서 8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생의 전성기를 별로 달가와하지 않았던 권력에 의해 보장받았고,
그에게 닥친 신체적 고통과 자유에의 갈망은 그 권력을 등지게 만들었고,
그가 인간 비극의 실체를 탐구하도록 이끌었다.
운명은 그에게 가혹했고 그도 생의 전반부를 탕진했다.
그래서 후반부의 그의 생과 예술은 어찌보면 운명 앞에 마주 선 하나의 '눈'이었다.
근대의 가장 이른 새벽을 여는 '눈' 바로 그것이었다. 어쩌면 그가 가장 스페인적인
화가일지도 모른다.
고야의 <1808년 5월 3일> 앞에서 나는 궁정화가 고야와 시대의 증언자로서 고야를
동시에 떠올려 본다. 그리고 예술가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해묵은 문제를 다시 곱씹어본다.
우리시대는 고야의 증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또 다른 고야를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그것이 당대 리얼리즘 미학의 정수를 이루는 것이리라.
역사는 항상 현재형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작품; 1808년 5월 3일/피오왕자 저택 앞에서의 총살
작가; 고야(Francisco Jose de Goya y Lucientes 1746-1828)
크기; 266 X 345cm
제작; 1814
소장;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4d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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