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8.29

*'청춘미술관'이라는 글들은 1995년에 목적을 가지고 작성된 글들이며
지금 보고 있자니 부끄러운 글들이나 그것이 숨길 수 없는 내 재주라는
생각에 수정 없이 그대로 올린다.
계속 서랍 속에 넣어두자니 글들에게 미안해서 이렇게 올리고 그 용도를
이제 폐기할까 한다.
밑그림이라는 소제목의 글들은 몇편 소개한 적도 있지만 실제는 하나의 그림을
정교하게 설명하는 목적을 가진 글이었던 기억을 되살려 지루하지만
그림에 대한 이야기까지 수록한다.


빛과 어둠의 고백 - 성 바울로 풍의 자화상


밑그림/ 매화마을의 어느 노인

나는 아무래도 영화와 현실을 혼동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대학엘 떨어졌을 때, 무슨 대단한 일을 했다고 <바보들의 행진>에서 처럼
동해안을 여행하겠다고 나섰다. 그 여행은 혼자만의 여행이었다.
동해안 고속화 도로는 나의 상황이 그랬는지, 겨울이라 그랬는지 참으로
사람의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지금도 망양정에서의 그 절벽같은 바다를 잊을 수 없다.
속초에서 길은 끝이 났고 나는 다시 낙산사로 되짚어 내려왔다.
다음날 삼척에 도착해서 늦은 아침을 먹던 나는, 걸어서 부산까지 가보자는
황당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예상은 했지만 더 힘들었고, 힘들었지만 동해안은 가슴 벅찬 감동으로 다가왔다.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고래 고래 괴성을 지르며, 대부분은 멍하니 바다를 보면서
난 이틀에 걸쳐 동해안을 걷고 있었다. 이틀째 해질녘, 난 완전히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
조그만 포구에 당도했는데, 매화라는 마을 이름이 눈안으로 들어왔다.
난 당연히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민박집을 바라고 마을로 터벅 터벅 걸어들어갔다.
하지만 그 마을은 지나는 길손 조차 없었는지 민박이라는 글씨와 닮은 팻말 하나 보이질 않았다.
마을 어귀에 있는 구멍가게에 다리 쉼을 할겸 들어섰다.
초췌한 얼굴의 노인네가 지키고 있는 가게였다. 가게는 궁상이 뚝뚝 떨어졌고
천장에 붙어 있는 끈끈이에는 지난 여름에 죽은 파리들이 여전히 붙어 있었다.
나는 하룻밤 지낼 만한 민박집이 없겠느냐고 노인에게 정중하게 물었다.
노인은 한참 나를 바라보더니, 그 마을엔 손님을 받는 집은 없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약간 뜸을 들이다가 한마디 덧붙였다.
"여기서 하루 묵어 가려면 그러시게. 속초에서 내려오는 버스도 낼 아침이나 되어얄텐데"
노인의 방은 가게에 매어 달린 바람막이 옹색한 골방이었고, 나에겐 마당을 두고 있는
사랑채 같은 다 쓰러져 가는 방을 하나 내어주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 그 방엔 노인의 여분의 짐 등속이 있었고 몇장의 사진이 이발소 풍의
액자에 단정하게 끼워져 있었다. 별달리 볼 것도 없는 그 방에서 나는 팔배개를 하고
그 사진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노인의 아내인듯한 여인의 젊은 시절 사진과
아들인 듯한 교복차림의 앳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노인과는 다르게
눈매가 시원하고 귀티가 나는 인상이었다.
나는 지치고 허기져있었다.
체면 불구하고 소태같은 생선 반찬으로 두 그릇의 밥을 해치우고 좀 느긋한 상태를
찾을 수 있었다. 밥상을 물리고 담배를 피워 무는 노인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던
것도 그때였다. 골 깊은 주름에도 불구하고 노인의 눈은 의외로 맑아보였다.
그의 손은 얼굴과 다르게 비교적 고운 편이었다. 노동으로 단련된 강한 인상을 주지는 않았다.
그냥 덤덤하게 앉아 있기도 어색해서 나는 슬며시 그 방의 사진이야기를 꺼냈다.
"저.... 건너방 사진에 있는 교복 입은 사람은 아드님이십니까"
그는 보일 듯 말듯한 웃음을 지었다. 뭔 대화를 하기에는 나의 얼굴이 앳되어 보였을까.
잠시 말없이 앉았더니 말문을 열었다.
"그건 내가 고등학교 다닐쩍 사진이라네"
난 한동안 할 말을 잃었다.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노인과 건너방 사진의 주인공이
같은 사람이라니. 아무리 세월이 흘렀다고 하지만 사람의 얼굴에는 본디적 흔적이 남아
있음이 당연하지 않은가.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세월의 변화무쌍을 알 턱이 없었다.
노인은 그 옆의 사진은 자신의 어머니라는 사실도 함께 알려주었다.
노인은 나에게 되짚어 물어왔다. 나는 왠지 거짓말을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고,
나의 처지와 여행에 대해 이야기했다.
"금새 지나간데네, 금새..."
노인은 그렇게 이야기했다.
그날 밤 나는, 뜻하지 않은 곳에서 뜻하지 않게 만난 노인의 인생역정을 들을 수 있었다.
천천히 사색하듯 이야기하는 노인의 세월은 밤을 이어갔다.
"피곤할텐데 건너가서 쉬시게"
한 편의 영화를 본 듯한 마취상태에서 깨어나 내 방으로 돌아온 나는
한참 동안 노인의 어머니와 노인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건너방에선 노인의
마른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늦은 아침, 난 그 마을을 떠났다. 다리는 완전히
딱딱해진 상태였다. 버스를 탔다.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간간히 노인의 골깊은 주름을 떠올렸다.
5년 후, 나는 친구들과 다시 동해안 여행을 떠났다.
내려오는 길에 나는 매화마을 찾았다. 이름없는 포구에서 하룻밤 묵어 가는 것도
운치있는 일이라며 친구들을 끌고 그 마을에 들어선 나는 노인의 구멍가게부터 찾았다.
가게는 여전했다. 그러나 노인은 없었다. 노인은 이미 2년 전에 세상을 뜬 후였다.
초라하니 몇대의 배어 매어져 있는 마을의 방파제로 걸어나왔다.
바다가 하도 눈이 시리도록 푸르러서 그랬는지 나는 울고 있었다.
그 바다 앞에서 난 노인의 생과 얼굴에 대해 침묵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그 노인의 본은 나와 같은 안동이었고, 성씨는 김자를 썼다. 독신으로 늙었고
사랑했던 여인이 있었다. 그리고 빨치산이었다는 이유로 그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사람이 무서워서 나에게도 하게투로 이야기했다는 것,
세월이 그의 얼굴을 그렇토록 황량하게 체념한 얼굴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
이것이 그 노인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전부다.



생의 독백

우리가 집중적으로 감상할 그림은 1633년과 1661년에 제작된 렘브란트의 자화상이다.
여기 두 얼굴이 있다. 두 얼굴은 모두 한 사람의 화가가 세월을 두고 기록한 자기 생의 독백이다.
이 얼굴의 주인공은 바로 렘브란트다. 렘브란트 그는 자화상만으로도 충분히 위대한 화가이다.
그는 일생 동안 백여점의 자화상을 남겼다.
우리는 한 사람의 화가가 아니라 한 인간의 지난한 생의 기록이라는 엄숙한 현장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이다.
1633년에 제작된 자화상은 작가가 27,8세 때의 모습이다.
렘브란트는 이 무렵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라는 작품으로, 탁월한 초상화
제작자로 나이 보다 이른 명성을 얻고 있었다. 이 자화상은 패기만만하고 자신에 찬
이 무렵의 렘브란트를 잘 보여주고 있다.
목에서 가슴께 까지 둘러 있는 동철제와 빛나는 장신구는 그 당시 유행하던
차림이고 한쪽 어깨엔 외투를 한껏 멋을 부린채 걸치고 있다. 붉은 기운이
감도는 머리칼은 의상의 색상과 조화를 이루고 있고 엘로오우크와 암갈색의
배경은 전체적인 화면의 분위기를 고풍스럽게 만들고 있다.
또 하나의 자화상은 그가 55세 때인 1661년에 그린 것으로 청년기의 자화상과
극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이때 그는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에 빠져있었다.
황색톤의 두건과 세월을 말해주는 뭉쳐지고 헝크러진 반백의 머리, 깊이 패인 주름,
깊이를 알 수 없는 렘브란트 특유의 강렬한 명암대비가 이 작품의 이미지를
결정하고 있다.
1633년의 자화상은 양식적으로 화려한 바로크 전성기의 그것을 예고하고 있다.
그는 약관이었고 생에 있어 어두운 면을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 당연한 자신감이었다. 젊은 날의 화가는 오직 가능성만으로 가득 찬 미래를
꿈꾸었을 것이다. 조용한 응시지만 그의 눈은 인생의 밝음을 예고하고 있고 그
뭉툭한 코는 아직은 그런 자신감을 돋보이게 하는 우뚝한 산처럼 그려져 있다.
1661년의 자화상으로 훌쩍 세월을 건너 뛰었을 때, 청년 렘브란트는 사라지고
어둠에 묻힌 노년의 렘브란트를 만나게 된다. 세월의 화살은 그를 비켜가지 않았고,
그는 늙었고 병들었다. 이미 너무 많은 슬픔을 감내하고 있었다. 이때 그의 자화상에
나타난 밝음은 어둠을 설명하기 위해 존재하고 있다. 거의 직각으로 내비치는 빛은 그의
주름을 한결 드러나게 만들었고, 그 반대편 어둠에 숨겨진 주름의 안쪽과 그의 뭉툭한
코는 갖가지 세월의 상흔으로 생의 퇴락한 훈장처럼 자리하고 있다. 그는 이때 밝음,
즉 청춘의 빛을 회상하며 자신의 얼굴에 드리운 저 압도적 어둠을 조용히,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렘브란트, 그 생의 명암

렘브란트는 1606년 네덜란드의 라이텐이라는 도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부유한 제분업자였다. 그의 인생은 1642년을 경계로 해서 명암이 엇갈린다.
1632년부터 1642년까지 그는 부와 명예의 바다를 헤엄쳐 나가는 한 마리의 고래와 같았다.
1630년에 제작된 에칭 자화상을 보면 그는 누더기를 걸치고 수염도 깍지 않은
거지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것은 물론 풍자적인 것이다. 그때 그는 풍족한 세계에 대해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 그는 그 풍족한 세상에 포섭당해 버린다.
수 많은 검은 옷과 팽팽한 린네르 천을 차려 입은 사람들은 렘브란트의 손을 빌려
자신들을 치장하고 싶어 했고, 렘브란트는 충실히 그 요구에 부응했다.

그에게는 일생 동안 두 명의 여인이 있었다. 사스키아(Saskia Van Uylenburgh)와
헨드리케(Hendrickje Stoffels)가 바로 그 여인들이다. 우리는 그녀들을 그림 속에서
만나볼 수 있다. 사스키아에 관한 그림은 많은데, 특히 플로라 연작 4점 중 3점이
바로 그녀를 모델로 한 것이다.
1632년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로 명성을 얻어갈 무렵, 부유한 집안의 딸
사스키아를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사치를 좋아했고 귀엽고 화려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렘브란트는 그녀에게 화려한 금은자수의 빛나는 실크 옷을 입히고 그림을 그렸다.
사스키아는 네번째 아이 티로우스를 낳았다. 이후 그녀의 건강은 급속히 나빠졌고,
1642년 렘브란트와 생 후 1년이 채 안된 아들을 남겨 놓고 눈을 감았다.
사스카아와 렘브란트는 이미 세 아이를 병으로 잃어버린 후였다.
그는 일시에 모든 것을 잃어 버린 듯한 상실감에 빠졌다.
그리고 1642년은 그의 작업에서도 분수령을 이루는 시기였다.
그해는 그의 걸작 <야경>이 완성된 해였다. 그러나 이 걸작은 발표 당시 주문자들의
강한 불만을 샀다. 이후 그에게서 주문이 거의 끊어지는 원인이 되기도 했던 작품이다.
이후 그의 인생은 내리막 길이었다.
이때부터 렘브란트 곁에는 헨드리케가 있었다.
사스키아가 남긴 아들 티토우스를 돌보았던 가정부였던 헨드리케는 정식으로
그의 아내는 아니었다. 헨드리케의 이런 불완전한 자격은 렘브란트의
경제적 어려움 때문이었다.
사스키아는 유언에서 렘브란트가 재혼을 하면 유산상속인의 자격을 박탈하도록
명시해 놓았던 것이다. 자신의 사랑을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겠다는 미지의
여인에 대한 질투심이었을까. 어쨌든 파산선고 까지 받은 렘브란트에게 있어
사스키아의 유산은 현실적으로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헨드리케는 언제까지나 고용인이었다. 그들은 몇 번이나 교회에 불려나갔다.
심한 비난을 받았고 성찬회(주)에서 추방당하기도 했다.
나는 이 대목에서 헨드리케라는 여인의 불은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목격한다.
파리 루브르 미술관에 있는 <헨드리케 스토펠의 초상>은 그녀가 24세 경의 모습이다.
생활고 때문인지 불완전한 아내라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정신적 고통 때문인지,
내 눈에는 30대의 여인으로 보여진다.
실질적으로 렘브란트의 아내 노릇을 한지 5년째 되는 해였다.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사스키아와는 대조적으로
그녀는 허영심이 없었고 성품이 온화해 보인다. 무식했었다는 사가들의
평가와 충실한 동반자였다는 평가가 함께 있다. 렘브란트가 그녀에게 해 줄
수 있었던 것은 그림으로 그의 사랑을 전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런
위로가 그녀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을 가시게 할 수 있었을까.



가진자는 어둠을 싫어한다

렘브란트가 애초부터 관조적인 작업경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금 후세의 찬사를 한 몸에 받고 있는 프란스 할스, 야콥 루이스달,
얀 베르메르와 같은 거장들의 이름을 17세기 네덜란드 회화사에서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일생 동안 부와 명예를 누린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당시 네덜란드라는
나라의 역사가 만들어 낸 사회적 배경에 많이 원인을 두고 있다.
네덜란드는 16세기 말까지 스페인의 식민지였다. 무역이 번성했던 이 나라는
구교보다 신교의 영향이 강했다.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등의 나라에서 구교
핵심권력이었던 교회나 귀족들이 예술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과는 달리,
네덜란드에서는 부유한 시민계급이 그 역할을 대신했다. 우상숭배에 대한 부정이
신교발생의 한 원인이었는데 이런 사고를 바탕으로 한 시민계급은 17세기
네덜란드 회화의 중심 이야기꺼리를 현란한 의상이나 화려한 장식 따위의
세속생활로 집중시켜 나갔다. 그것은 시민계급의 기호에 맞는 이야기들이었다.
시민계급은 예술의 강력한 후원자들이었다. 미술작품은 그때 이미 부동산과
산업투자와 어울리는 투자의 대상이었다. 그림시장은 활기있었고 화상들이
그 모든 거래를 중계했다. 많은 수요는 그 보다 많은 공급자들을 양산했다.
그래서 작품의 질과 가격은 번번히 화상들에 의해 조절되었다.
이들의 손을 거쳐야만 거래는 성립되었다. 화상들은 수요자를 독점하고 있었고
그들의 기호를 너무나 잘 파악하고 있었다. 이것은 화가들의 자유로운 창작을
방해한 요인이기도 했다. 화가들은 가난했다.
렘브란트는 한동안 이런 구매자들과 화상의 기호에 충실했다.
그러나 1642년을 전후해서 그가 인간의 내면에 대한 표현에 집중하자
시민계급은 등을 돌렸다. 물론 그는 거장으로서 인정받았지만, 주문에 적합한
제작자는 더 이상 아니었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그의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빛을 이용한 화면처리는 극적인 장면을 강조하기 위해 직사적 조명법으로,
어둠 속에서 인물이나 장면만 반사시킨 표현법이다. 이것은 어둠이 아니라
빛을 묘사하기 위한 주관적 표현기법으로 미술사적으로 혁신적인 것이었다.
지금까지 렘브란트의 이 명암법은 사실적인 묘법의 교과서로 자리하고 있다.
미술사학자들은 렘브란트의 이 명암법이 인간성의 암시적인 노출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보여야 할 곳과 가려야 할 곳을 선택한다는 것은 곧
작가의 주관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빛이 밝힌 것은 어둠이 가리고 있는 미지의
형상을 간접적으로 시사해 주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명암법과 렘브란트를 거의 동일시할 정도로 그의 명암법은 탁월한 것이었지만
주문자들은 그들의 모습이 어둠에 가려지는 것을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가진 자들은 어둠을 싫어했다. 그것은 엄연한 사실에 대한 두려움이기 했다.



빛과 어둠의 고백

1650년 경 그는 파산하였다.
경제적인 상황은 그를 고독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자유로왔다.
주문은 거의 끊긴 상태였고 이때부터 그는 자신만을 위해 작업했다.
그는 한때 풍요로운 바로크 형식의 탁월한 기술자였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주문자의 요구에 따른 '주문생산자'의 모습이었는지도 모른다.
<야경> 이후로 그는 17세기 중엽의 잘 다듬어진 네덜란드 특유의 화풍과는 거리가 먼
강한 표현력을 가진 입방체와 삼각형에 의한 기하학적 형태로 그려내고 있었다.
그에게 형(형태 또는 얼굴)은 자체로 탐구의 대상이었다.
장신구의 현란함과 그 반짝임은 그에게 더 이상 그려야 할 의미를 주지 못했다.
그 현람함과 반짝임이 생의 진실을 대신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에게 있어 얼굴은
세상사 척도의 표준이었고, 감정의 대변자였고, 하나의 포괄적인 소우주였다.
얼굴은 그의 예술을 본바탕에서 부터 표면까지 두루 관통하는 예술혼의 원형이었다.
1640년경 까지 그는 자화상에서 모피와 갑옷으로 몸을 치장하고 있었다.
그때 그는 자신을 위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천성적 직관력은 자신의
그런 변장을 언제나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오히려 그의 변장은 허영과 위장으로 감 싼
자신의 삶과 대비되는 저 뭉툭한 코를 더욱 드러낼 뿐이었다.
1650년경부터 그의 자화상은 동기에서부터 변화한다.
그는 더 이상 스스로를 위해 표정을 만들지 않았다. 그가 살아온 세월과 체험은
그의 꾸미기가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깨닫게 해 주었다. 그는 자신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이제 그는 그의 나이 든 얼굴과 눈 밑으로 처진 지방질의 허약함을 겸허하게 인정하게 되었다.
이전까지 자기 방어적 허영심의 자화상에서 단지 정확한 색채와 터치로 스스로를 솔직하게
재현하는 것에만 집중했다.
렘브란트의 자화상이 위대한 것은 바로 이 대목이다.
그는 자신의 얼굴에 대해 약간의 변명과 희망을 담은 미화를 첨거하지 않았다.
문지르고 광택을 내고 팔레트 나이프로 세밀한 터치를 넣고, 그 모든 기법이
마른 후에 또 반복하는 수법으로 제작된 이 자화상들은 그 과정자체로 세월을
요하는 것이었다. 그 많은 시간 동안 모델에 응할 수 있었던 사람은 말년으로
갈 수록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더더욱 스스로를 그릴 수밖에 없었다.
때때로 우리는 감추고 싶어한다.
생의 어두운 면은 가능하면 나의 내부로부터 추방시키려는 바램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얼굴은 언제나 그 자체로 인생을 비추이는 거울이다. 저 이마의 주름살
어디쯤엔가 젊은 날 그의 지나친 욕망이 화석으로 변해 남아 있을 것이다.
저 눈가의 잔주름에는 그로 인해 고통받았을 지도 모를 타인들의 한숨이 새겨져
있을 것이다.
움푹 패인 저 볼의 어둠은 타인들로부터 받은 상처로 인한 훈장일지도 모른다.
감출 수 없다. 아니 감추지 않는다.
감추려고 발버둥칠 수록 저 주름은 한층 골을 깊이 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처음의 두 작품으로 돌아가자. 1633년과 1661년의 자화상을 지긋이 눈을 감고 감상해 보자.
나는 이상하게도 1661년의 자화상을 보면서 편안함을 느낀다. 그 압도적 어둠에도 불구하고
그의 쇠락한 모습이 모든 것을 인정하고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확신을 가진다.
거의 경외심으로 까지 발전한 감동은 그의 얼굴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
냉혹한 자기해부 정신과 사람의 얼굴에 베어난 ‘생’에 대한 외경심일 것이다.
그것은 추함이 아름다움으로 변하는 마술이다. 진실의 마술이다.
영국의 저명한 미술사가 케네드 클라크(Kenneth Clark)의 말을 빌어 그 외경심을 대신한다.

"... 체험이 예술로 변모하는 마술에서 사람들은 외경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저 빨간 코에 의해, 나는 힐책당하는 것 처럼 느껴진다. 돌연 나는 자신의 도덕성의
천박함이나 나의 공감의 옹졸함, 그리고 내 직업의 허무함을 생각하게 된다.
렘브란트의 거대한 천재성이 갖는 겸허함은, 미술사가에게 침묵할 것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작품;성 바울로 풍의 자화상
작가;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 van Rijn 1606-1669)
재료; 유채/캔버스
크기; 91 X 77cm
제작; 1661년
소장; 암스테르담 미술관

4d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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