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8.29

*'청춘미술관'이라는 글들은 1995년에 목적을 가지고 작성된 글들이며
지금 보고 있자니 부끄러운 글들이나 그것이 숨길 수 없는 내 재주라는
생각에 수정 없이 그대로 올린다.
계속 서랍 속에 넣어두자니 글들에게 미안해서 이렇게 올리고 그 용도를
이제 폐기할까 한다.
밑그림이라는 소제목의 글들은 몇편 소개한 적도 있지만 실제는 하나의 그림을
정교하게 설명하는 목적을 가진 글이었던 기억을 되살려 지루하지만
그림에 대한 이야기까지 수록한다.

뻔뻔함과 파렴치함의 미학 -올랭피아


밑그림/ 훔쳐보기에 관한 보고서

누구나 ‘훔쳐보기’에 관한 낯 부끄러운 기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런 것 자체를 본능을 제어하지 못하는 한심한 이성을 가진 사람닮은
짐승들의 놀음으로 여기는 사람의 경우는 예외다.
훔쳐보기는 사적인 비밀로 바로 연결된다. 차마 가장 친한 친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이 그 행위의 주변을 에워싸고 있고 예정된 실패를 향한 유혹
또한 끈적끈적하게 목덜미를 간지르곤 한다.
중학교 시절, 우리 또래들의 가장 가슴 설레이는 '놀이'는 바로 여선생님들의
치마 밑에 조그만 손거울을 놓는 것이었다. 사춘기에 접어든 까까머리 중학생들.
그 어정쩡한 몸매를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온다. 기껏 길러봐야 빡빡을 겨우
면한 채 1cm도 되지 않았던 머리카락에 물을 바르고 다녔던 녀석들.
여름이면 우린 검정 반바지에 다 죽어자빠진 물고기 같은 색깔의 반팔 상의를
입고 있었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이르는 기나긴 길목의 초입에 선 우리들은 마치
말라빠진 병아리와 닭 사이의 야릇한 조류와 같은 몸매에 그 촌스럽고 커다란
교복을 입고 있었다. 그때 우리들의 부모들은 한창 성장기인 우리들의 체격을
예상하고 옷으로 아이를 포위할만한 치수를 선호했었다. 그리곤 꼭 이 말을
잊지 않으셨다.
"아이고, 꼭 맞다!"
제법 콧수염이 거뭇해지는 녀석들도 있었고, 그 어정쩡한 다리엔 가물에 콩나듯
하는 검은 털들이 마치 제것이 아닌양  위태하게 붙어 있기도 했다.
그즈음 우리들 사이에서는 수음이 일반화되어 가고 있었고, 몽정을 경험하기도 했던
시기를 넘기고 있었다. 한마디로 눈물겨운 나이였다. 그 몸매와 복장에 어울리지 않는
'욕망'은 어린 육신들을 쉼없이 괴롭혔다. 자신의 몸이, 본능이 요구하는 이런
'침꿀꺽' 현상은 과연 도덕적으로 타당한 것인지에 대해 어느누구도
대답해주지도 않았다. 물론 묻지도 않았지만...
어쨌든 그런 현상이 자신에게만 일어나는 죄스러운 것이라는 심적고통을 느끼기
조차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욕망이 옆자리의 짝지녀석과 앞자리, 뒷자리 녀석에게도
일어나는 공통적인 현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고 시익 웃을
수 있게 되었다. 바야흐로 작은 욕망들은 훔쳐보기를 위한 공모와 공범을 작당했고
가담했던 것이다.
적어도 우리에게 있어 성에 대한 의식은 중세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철저히 은폐되어야 했고, 입밖으로 내어서는 안되는 가문의 비밀이요,
민족의 비밀이었다.‘호르몬’이라는 말만 들어도 얼굴이 붉어지는 이상했던 시절,
우린 참으로 기막힌 경험을 하게 되었다.
교실에서의 우리의 놀이는 공공연하고 정도를 넘어선 수준에 이르고 있었다.
가끔씩 현행범으로 체포된 경우엔 영락없이 벌개진 얼굴의 아무말도 하지 못하는
여선생님의 손에 귀 끝을 잡힌 채 교무실로 끌려갔다.
토요일이었다. 우린 마지막 한시간을 남겨놓고 있었다.
방과 후 우린 매주 토요일이면 그랬듯이 시장 골목에서 칼국수를 먹고 탁구를 치거나
성인용 영화를 볼 수 있을 것인가, 없을 것인가에 대해 논쟁을 벌이는 일만 남겨 놓고 있었다.
몇명의 악동들은 그런 들뜬 분위기를 틈타 그 문제의 거울을 다시 바닥에 내려 놓았다.
영어선생님은 왜 여선생님이 많았을까?
그리고 그때 그 선생님들은 왜 그리도 예쁘기만 했을까? 콧대높기로 유명했던
바로 그 선생님의 시간. 마침내 그 일은 벌어지고 말았다. 몇몇 우상의 신봉자들은
조용히 만류했지만 악동들의 끈질긴 시도를 저지할 수는 없었다. 교실 한 가운데서
낭랑한 목소리로 유창하게 본문을 읽어 내려가던 선생님의 목소리가 갑자기 뚝 끊어졌다.
"쨍그랑" 날카로운, 누구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던 소리가 교실에 메아리쳤다.
정적이었다.
선생님은 가만히 천정을 바라보고 계실 뿐이었다.
우리는 모두 침을 꿀꺽 삼키고 앞으로 벌어질 암담한 주말 오후의 운동장 뜀뛰기를 상상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그렇게 보고싶어!"
가늘게 떨리는 선생님의 소리와 함께 스커트는 땅으로 떨어졌다.
교실은 그 놀라운 광경에 완전한 침묵으로 빠져들었다.
교실전체의 코마상태와 같았다.
우린 보았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열리지 않을 것 같았던 빗장이 열렸을 때,
우리의 훔쳐보기는 더 이상 지속될 필요가 없었다. 아니 지속할 수 없었다.
우리의 작은 욕망들은 그 순간 여지없이 깨어져 나갔고, 극심한 수치심에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우리는 선생님의 수치심을 염려할 필요도 없을 만큼 비참해졌던 것이다.
우리의 놀이는 멈출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훔쳐보기에서 바로보기를 열망했지만
그 순간이 막상 도발적이고 충격적으로 다가섰을 때, 우리의 상상이라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전면을 들어낸 우리의 욕망은 의외로 뻔뻔스러움이라는 외모로 치장된 자존심으로 존재해
있었고, 우린 우리들의 욕망이 다름아닌 파렴치함이라는 본질로 까발려진 현실 앞에서
망연자실 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우린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를 느꼈었는데,
아마도 그 분노의 대상은 바로 우리 자신이었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 볼 수 없는 영화가 없게 된 후에도 난 간혹 이런 분노를 느끼곤 했는데 그것은
대사회적분노였다. 어떻게 전 사회가, 이 세상이 이렇게 뻔뻔스러울 수 있는가라는...



외설이냐, 예술이냐-1863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사적으로 성은 백주대낮에 고래고래 고함지르면서 떠들어 댈 수는
없는 화제꺼리였다. 요즘이야 컴퓨터 통신을 통한 청소년들의 음란물 감상을 어떻게
저지할 것인가라는 상황으로 까지 발전(?) 했지만, 마네가 <올랭피아>를 발표했던 시절만
해도 완전한 나체화, 그것도 정면을 향해 고개를 꼿꼿하게 쳐들고 있는 여성의 누드를
그렸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센세이셔널한 하나의 사건이었다.
<올랭피아>만큼 발표당시 문제를 일으킨 작품을 들라면 아마도 <풀밭에서의 점심>일 것이다.
이 작품도 마네의 작품이다. 1865년 살롱전에 출품된 <올랭피아>에 대한 신문과 비평가들의
찬사는 이런 것이었다.
"천하고 파렴치하다"
"배가 노란 창녀"
"인도산 고무로 된 암 고릴라"
"출산이 임박한 부인과 양가의 자녀는 피해서 지나쳐야 할 작품"
신문과 비평가들, 그리고 대중들은 <올랭피아>를 예술이 아닌 하나의 음란물로 취급했다.
마네에게 비교적 호의적이었던 쿠르베도 이 때는 한마디 거들었다.
"목욕하고 나온 스페이드의 여왕(spade of queen)"
이렇게 저널리즘이 떠들어대니 사람들은 호기심이 동할 수밖에 없었다.
보기도 전에 욕하기로 작정하고 마네의 그림을 보기 위해 살롱의 전람회장으로
인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알파벳 순으로 진열된 그림들 중 유일하게 마네의
<올랭피아>는 그 순서를 무시하고 제일 끝방 문위의 어두운 벽으로 옮겨졌다.
그래도 <올랭피아> 앞에는 지팡이로 삿대질하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지금 우리들의 시각으로 보면 참으로 진풍경이 아닐 수 없는 이런 상황은
왜 벌어지게 되었을까?
마네가 나체화를 처음으로 그린 것은 물론 아니다. 르네상스 이래 나부는 몇번 그려져왔다.
당시 루우브르에도 진열되어 있었다. 고야의 <나체의 마야>도 마네의 그것보다 얌전한
포우즈를 취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야'라는 은유적 명칭을 가지고 있었다.
티치아노가 그린 <우르비노의 비너스>는 <올랭피아>와 거의 같은 모티브를 다루고 있다.
두 작품을 비교해보면 마네가 티치아노의 구도를 그대로 본 뜬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나부를 크게 배치하고 배경의 왼쪽에는 아무것도 없는 무지의 백, 오른쪽은 하녀, 겹친 다리,
손의 위치, 팔찌와 반지, 흰 시이트의 모양에 이르기까지 거의 같은 구도와 배치를 보이고 있다.
요즈음 식으로 말하자면 이른바 패러디에 해당할 것이다.
차이점은 나부의 발 밑에 티치아노의 그것은 웅크린 개가 있는 반면에 마네의 그림에는
기지개를 켜는 고양이가 있고, 티치아노의 하녀는 둘이고, 마네의 하녀는 한명이고 또한
흑인이며 꽃다발을 그녀에게 전달하려는 포우즈를 취하고 있다.
사실 이 흑인 하녀조차도 1842년 살롱에 출품되어 당시에는 호평을 받았던
장 자르베르의 <오달리스크>에서 본 딴 것이다. 결국 이 모티브도 '천하고', '파렴치하다'는
평가의 이유는 되지 못할 듯 싶다. 나체와 모티브 때문에 사람들이 분노한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분노한 까닭은 바로 <올랭피아>에서 마네가 ‘사람’을 발가벗겨 놓았다는 사실에 있다.
상투틀고, 머리 땋았던 시절에 나체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묶여진 머리의 세월만큼 질기고 긴
'욕정'으로 꿈틀대어서 신윤복의 그림에 목욕하는 여인네를 훔쳐보는 어린 중님들을 만들었고,
파란눈 나라에서는 인간의 모습을 빌린 신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보여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은유와 은근의 미학이 그동안 회화사를 지배해왔던 성에 대한 기본입장이었다면 마네는
그 입장을 달리했던 것이다.
티치아노의 경우처럼 이전의 나부상은 신화나 역사라는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신화상의 여신이 발가벗고 누워있었던 것이지, 결코 사람이 발가벗고 누워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부를 이제껏 실컷 감상하고도,
"이것은 비너스다. 비너스!"
이런 식으로 자기 체면술을 걸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당시 사회의, 역사의 암묵적 동의가 만들어 낸 또 다른 형태의 '훔쳐보기'였던 것이다.
도덕성이 욕망에 대해 우위를 점하고 있었던 시절, 옛 사람들은 어쩌면 이런 방식으로 원초적
본능을 공인했던 모양이다. 여기까지는 엄연한 예술품으로서의 비너스였다. 그리고 내심으로
비너스가 현실의 사람이기를 원하지 않았겠는가.
마네는 이런 그들의 얼굴에 대고 정면으로 직격탄을 날려버린 것이다.
"이봐, 그건 비너스가 아니라 바로 옆집 아가씨잖아!"
그러자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이 발각나버린 것에 대한 반응을 격렬한 부인으로 나타낸 것이다.
소동의 원인과 이유, 결말은 바로 이것이었다.
"저 녀석이 말만 하지 않았어도..."
영원할 것 같았던 암묵적 동의를 위반했다는 배신감에 <올랭피아> 앞에는 지팡이를 든
남자들이 벌개진 얼굴로 모여들었던 것이다. 마네의 발설로 인해 예술은 외설로 변질되어
버렸다. 근대의 문턱에서 예술과 외설은 신과 인간 중 누구의 옷을 벗겼는가에 의해 결판났던
것이다. 사람이 신을 옷벗기는 것, 그리고 신이 사람을 옷벗기는 것은 용납되었지만 오직 하나,
사람이 사람을 옷벗기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마네는 이미 <올랭피아> 보다 2년전에 <풀밭에서의 점심> 이라는 범죄(?)를 저지르고 있었다.
이 그림에는 당시 유행했던 복장을 한 두명의 남자와 함께 있는 벌거벗은 여인을 그리고 있었다.
여자만 벌거벗었다는 이유로 현대에 들어서서 또 다시 구설수에 오른 이 그림에서 정작 등장
인물들은 벗은 이와 입은 이 모두 아무렇지도 않은 듯 우리를 향하고 있다. 그림에 등장한
이 여인은 마치 감상자를 향해 '당신도 벗어보라'는 무덤덤한 제안을 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두 그림에 등장한 여자는 동일한 인물이다.
빅트리느 무랭이라는 이 소녀는 마네가 파리의 칼티에 라탕(학생의 거리)을 걷고 있을 때
우연히 포착한 모델이었다. 1860년대 마네의 작품에 자주 등장했다. 마네는 이 모델을
이상화하거나 신격화시키지 않았고, 뚜렷하게 그녀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그렸다.
그녀는 파리에 살고 있었고, 사람들은 그녀를 알 수밖에 없었다.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한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욱 분노했던 것이다.
때로 혁명은 총이 아니라, 이렇듯 성에 대한 논쟁으로부터 시작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나폴레옹 3세 정부는 보들레르의 <악의 꽃(주)>이나
플로베르의 <보바리부인>을 고발했다(보들레르는 마네의 친구이기도 했다).
화려함에도 불구하고 제 2제정은 19세기 프랑스에서 가장 풍기문란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했던 정권이었다. 그것은 그만큼 <올랭피아>에 나타난 파렴치함이
일반적이고 공공연한 비밀이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근대의 문턱에서 인간의 누드는 봉건적 사고와 부도덕한 부르조아에 대한 자유주의자의
데몬스트레이션이었고, 착의와 탈의의 차이는 성의 해방이 아니라 생산관계의 거대한
역전극이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던 당시 사회의 민감한 성감대와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1860년대의 외설은 혁명이었고, 그 뻔뻔함과 파렴치함은 예술이었다.
품위와 거드름의 미학에 대한 새로운 미학적 대응이었다.
상류층은 그 짙은 화장속에 그 파렴치함을 숨기고 있었다.
가면이 너무 가면 같으면 사람들을 속일 수 없다.
우습게도 중세봉건왕조 또는 그 마지막 통치형태인 프랑스 절대왕정은 이런 뻔뻔함에 의해
조롱당했고, 당시 부르조아들은 거부했지만 권위와 위선이 종말을 고하고 인간 그 자체의 모습,
객관적 사실과 물 그 자체가 존중받는 자본주의 사회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서곡과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근대의 시작이었다. 마네는 그것을 선언했다. 그래서 파렴치함은 바로 근대의 서곡을
구성하는 포르테에 해당했다. 마네는 문제아였다. 그러나 공공연한 비난과 암묵적 지지의 중심에선
문제아는 시대에 따라 선구자가 되기도 했다.



목욕하고 나온 스페이드의 여왕-2차원으로의 방향전환

<올랭피아>는 서구 400년 회화사에 대한 반란이었다.
이것은 시대적 상황이나 이 그림으로 인해 벌어진 에피소드와는 다른 차원의 진정한 가치를
지닌 부분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지점은 바로 이 대목이다.
마네는 <올랭피아>에서 400년 서구 회화사가 추구해온 3차원의 입체적 표현방식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올랭피아>는 철저하게 2차원적 평면의 색감을 가지고 있다.
티치아노의 그림에서 나타난  바닥무늬에 의한 한층 뚜렷한 원근법과 오른쪽 상단의
모습은 사라지고, 마네는 단색 배경으로 밀어버렸다. 아예 의도적으로 그런 원근법적
처리를 무시한 것이다.
티치아노의 그림에서 명암은 이런 원근과 앞과 뒤의 구분을 가능케하는 주요한 수단이었지만,
마네는 거의 모든 그림자를 없애버렸다. <올랭피아>가 <우르비노의 비너스>보다 훨씬 상의를
일어킨 것은 상반신이나 얼굴을 정면시점에서 평면적으로 처리하려고 한 의도때문이다.
마네의 <올랭피아>는 완전히 평면적인 장식성을 추구한 것이다.
2차원적 표현은 르네상스 이래 서구 사실주의적 미술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이다.
그간 회화는 어떻게 해서든 2차원적 평면에서 3차원적 묘사를 가능케하려고 아둥바둥해왓는데
그 노력에 찬물을 끼얹어 버린 것이다.
"목욕하고 나온 스페이드의 여왕"
쿠르베의 이런 반응은 바로 지금까지 언급한 마네의 반란에 대한 거부였다.
스페이드 즉, 트럼프의 한장에 해당하는 장식적 평면그림에 빗댄 것이다.
쿠르베는 어떤 화가보다도 뛰어난 양감표현을 보여준 화가였다.
따라서 그의 회화론에 의하면 그것은 그림도 아니라는 비난, 바로 그것이었다.
스스로 혁명가를 자처한 쿠르베조차도 마사치오(Masaccio)와 지오토(Giotto) 이래
축적되어온 원근법, 명암법, 살붙이기 등의 전통적인 사실묘사 기법위에 자신의 회화양식을
뿌리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과연 <올랭피아>는 트럼프의 낱장 그림에 불과한 것인가?
마네의 회화적 위대성은 바로 이 대목에 있다.
우리는 마네의 모델 빅토리느 무랭이 '스페이드의 여왕'이 아니라 살아 있는 육체를 가진
파리의 여인이라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육체볼륨은 마네 특유의
윤곽선과 탁월한 뎃생, 분홍빛이 빛나는 크림색의 피부색으로 정확하게 포착되어 있다.
정확한 뎃생에 의한 대상의 입체감 표현은 부분부분에서 나타난 선묘에 의해 구체화 되었고,
이것은 평면적 색면처리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고 있다. 이 무렵 이미 유럽에 선보이고 있었던
일본판화를 비롯한 동양의 그림들 영향이 분명히 미치고 있다.
특히나 우리의 주위를 끌고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것은 마네의 색이다.
명백하게 그것은 마네의 색이다. 빅토리느 무랭의 저 자신만만한 얼굴과 뻔뻔함은 마네의
밝음과 어두운 색의 평면적 대비에 의해서 더욱 강인하고 뚜렸하게 부각되었고,
색체의 대비 속에 어쩌면 3차원적 성격을 부여할 수 있었던 자기 모순까지 삼켜버렸다.
이것은 화면의 2차원성을 강조하려는 마네의 의도와 정반대의 결과이지만 양립할 수 없는
것을 색채의 조절을 통해 기적적으로 공존시킨 점이 바로 마네의 위대한 승리였다.



반동적 혁명가, 마네

에드와르 마네(1832-1883)는 19세기가 회화사에서 근대의 분수령이 되도록 이끈 한 사람이다.
마네 이전과 이후의 서구회화사는 각기 다른 길로 이어져 있다. 그 길목에 서 있었던 한사람
마네...
나는 마네를 볼 때 마다 동시대를 살았던 쿠르베와 대비시켜본다.
쿠르베는 스스로 사회주의자였고 최초의 노동자 정권인 파리꼬뮨에 참가한 혁명가였다.
그러나 그는 작업에 있어 전통적인 표현방식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었다. 그의 정치적 목적은
'혁명'이었지만, 그의 회화적 자양분은 '반혁명'이었다.
물론 형식과 양식적인 측면에서 그러하다.
하지만 시각언어, 미술에 있어 진정한 혁명은 과연 무엇일까?
마네는 스스로 전통과의 단절을 시도했다. 혁명가를 자처한 쿠르베 보다 부르조아들 속에서
자신의 지위를 확보하려 했던 마네가 결과적으로는 회화사의 혁명아가 되었다.
쿠르베는 철저한 야인이었다. 마네는 세련된 도시인이었다.
외출할 때는 복장 구석구석까지 신경을 쓰는 멋장이엿다.
눈에 보이는 것 만을 그린 마네의 태도는 물론 쿠르베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러나 그는 전원보다는 도시를, 노동자, 농민들 보다는 파리의 현대적인 풍물을
도시인의 감각으로 다루었다. 살롱에 낙선하였을 때 쿠르베는 예상했던 결과에 대해
자신의 혁신성을 주장했다.
마네는 낙선하였을 때 진정으로 낙담했다. 쿠르베는 꼬뮨의 지지자였고,
마네는 보수적 부르조아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하나의 아이러니다.
하지만 역사는 종종 이러한 역설에 의해 전개되어진다.
화가 마네는 캔버스 앞에서 그토록 혁명적이었으나 인간 마네는 그토록 보수적이었다.
이는 결국 마네 자신이 천재성에 의한 희생자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사실 그 때문에 그는 인간 마네가 진입하고 싶어 했던 사회로부터 심한 비난을 받는
댓가를 지불했다. 마네는 자신의 이런 댓가를 훨씬 넘어서는 영광을 감지했을까?
꼭 그렇치만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그런것 같기도 하고...
귀족들처럼 고상하고자 했던 부르조아가 사회체제의 중심이 된지 200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자본주의는 마네를 환영했고, 지금은 마네가 보면 얼굴을 들 수 없을 지경으로 확실한
외설이 판치는 세상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중학교 시절 그 충격적 해프닝은 전근대적 낙후성이 제어하고 있었던
또래들의 본능이 초래한 이해 가능한 파렴치함이었다. 여전히 성은 인류의 역사만큼
질긴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고, 그로 인한 논란의 끝은 예측 불가능하다.
성에 대한 인간의 도덕적 잣대는 항상 변해왔기 때문이다. 앞으로 또 어떤 외설이
마네의 외설만큼 큰 의미를 획득할 수 있을까? 나는 회의적이다. 오히려 비도덕이
마지막 남은 도덕을 학살하는 예술과 외설의 역전극을 두려워할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아무말도 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작품;올랭피아
작가;마네(Edouard Manet 1832-1883)
재료;유채/캔버스
크기;130X190cm
제작;1863년
소장;파리 루우브르 부속 인상파 미술관

4dr@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