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8.29

*'청춘미술관'이라는 글들은 1995년에 목적을 가지고 작성된 글들이며
지금 보고 있자니 부끄러운 글들이나 그것이 숨길 수 없는 내 재주라는
생각에 수정 없이 그대로 올린다.
계속 서랍 속에 넣어두자니 글들에게 미안해서 이렇게 올리고 그 용도를
이제 폐기할까 한다.
밑그림이라는 소제목의 글들은 몇편 소개한 적도 있지만 실제는 하나의 그림을
정교하게 설명하는 목적을 가진 글이었던 기억을 되살려 지루하지만
그림에 대한 이야기까지 수록한다.


백년만의 포옹 - 성취


밑그림/ 기다림에 대해서

기다림이 미덕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제 3자들이다.
아니면 기다리게 만든 사람이거나.
대개의 경우 기다림은 그 당사자들에게는 생명이 일초 더 단축되는 듯한
날카로운 매스의 날 위다
서양미술 이야기책 속에 좀 뭐한 비유이지만, 난 황석영 선생의 <장길산>에서
묘옥이 길산의 주검을 던졌다는 해주 바닷가의 언덕을 오르는 장면을 눈물로 읽은
기억이 새롭다. 결국 그 여인은 죽었다고 생각한 남자를 평생 기다렸다.
그래서 기다림은 모질다.
'애' 뿐만 아니라 '증' 까지 고스란히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기다림으로 인한 비극 중 가장 잔혹한 것은 '부질없는' 기다림이다.
부질없다는 것은 기다리는 이와 기다리게 만든 이가 모두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을 뜻한다. 그러나 기다리는 쪽은 항상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다른 사람의 경우는 몰라도 자신은 만남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일 퍼센트의 가능성,
그 끄트머리 실밥의 흔적이라도 놓치지 않는다.
이해할 수 없는 이 애증의 해법은 이름하여 '실패한 사랑'이다.
나는 그런 기다림을 알고 있다.
그들은 20년 정도의 나이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30대와 50대라면 그것은 별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10대와 30대였다.
그것은 계급만큼 큰 차별이다. 아꼈다. 따랐다. 문제는 세월이 흐른다는 것이었다.
동화에 머물렀어야 할 이야기가 소설로 발전했다.
세월은 소녀에서 변신한 여자에게 더 많은 상상력을 심어주었다.
하지만 불행의 씨앗은 그 상상의 끝자락이라도 내 비치기에는 그들의 시간이 형성시킨
관계의 성격이 너무 공고하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냥 서로에게 좋은 사람이라는 관계였다. 물론 상대방도 그 상상의 내용을 감지하고
있지만 차마 알고 있다는 내색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원래 고백이라는 형식의 ‘발설’은 양 극단의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한폭탄이다.
단추를 누른 순간부터 그 편안했던 10년의 관계는 가시방석으로 변해버릴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결단의 순간을 섣불리 맞이하기 보다는 힘겨운 지탱을 선택한다.
그것이 일 그램 더 행복하기 때문이다.
세월이 좀 더 흘렀다. 그는 아주 늦은 결혼을 했다.
나는 결국 그렇게 매듭지어지는 그들의 인내력을 지켜보면서 현명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그를 닮은 아들을 낳았다. 표면적으로 어떤 비극도 발생하지 않았고,
여전히 어떤 발설도 없었다. 하지만 기다리고 있다는 의식도 없이 10년 정도의 세월
을 보낸 그녀는 서서히 자신이 결국 기다리고 있다는 어처구니 없는 진실을 알게 되었다.
어떤 고상한 은유법을 동원한 위로도 '성취'하지 못한 사랑 앞에선
한 알의 아스피린만도 못한 것이다. 문제는 어처구니 없게도 그가 죽었다는 사실이다.
고속도로에서의 교통사고였다. 이제는 그의 아내도, 그의 아들도, 말하지 못한 기다림의
주인공도 그를 현실적으로 '성취'할 수 없게 되었다.
정신이라는 것은 때론 육체적 접촉 앞에서 무기력해지곤 한다.
정신만으로 사람을 소유한다는 것은 세속적이지 않으려는 우리들에게 조차 너무 힘든 요구이다.
육체는 마침표이다.
마침표 없는 문장은 끝없이
'그리하여', '그러나', '그리고', '그러므로'를 되풀이 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그녀가 기다린 것은 오랜 정신의 기다림에 종지부를 찍을 백년만의
포옹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불가능하다.
난 이런 기다림을 알고 있다.
다음에 그녀를 혹시라도 볼 수 있다면 아무래도 말해주어야겠다.
그는 죽었고, 당신은 다른 방식으로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고.
이것이 그녀와 또 죽은 그를 위해 내가 건내 줄 수 있는 한 알의 아스피린이지 싶다.
아마도 내 생각이 맞을 것이다.



백년만의 포옹

은근함은 때로 격렬함 보다 더 강한 흡인력을 가지고 있다.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의 <성취-Fulfilment>를 보고 있노라면
유구한 회화사에서 나의 초라한 경험이 판단할 수 있는 가장 '강렬한' 포옹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은 백년 숙성 된 포도주와 같은 포옹이다.
약간 검은 듯한 남자의 피부와 대조적인 창백한 피부의 여인이 우리 쪽을 향해
얼굴을 모로 기대고 있다. 남자의 어깨는 그 애잔한 소망을 충분히 담아 낼 만큼 넓고 견고하다.
남자는 하나의 건축물 처럼 요지부동으로 서 있다. 아마도 눈을 감고 있을 것이다.
서서히 끓어 오르는 체온에 의한 포옹의 현실감은 추하지 않다.
클림트의 다른 작품들에서 처럼 노골적인 에로티시즘은 이 장면에 전혀 끼어들 틈이 없다.
대중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그의 작품 <입맞춤>도 비슷한 모티브를 취하고 있으나,
이도 감미로운 분위기의 내밀한 에로티시즘을 숨기고 있다.
물론 여인의 표정에서 나타난 오랜 기다림의 흔적이 너무 절실한 탓도 있겠지만,
난 이 포옹의 성격을 규정하는 핵심은 바로 저 손에 있다고 믿는다.
나는 항상 저 손의 가지런함에 찬탄을 금할 수 없었다. <주디트와 홀로페론2>에서
나타난 저 노골적인 욕정의 손을 보라. <다나에>에 나타난 저 유혹의 손을 보라.
손은 클림트에게 있어 항상 제 2의 표정이었다. <성취>에서 나타난 저 가지런히 편
손바닥은 지금 남자의 등을 통해 가늠할 수 없었던 기다림의 흔적을 더듬고 있다.
어디선가 난 꼭 같은 애틋함을 가진 손을 본 적이 있다.
영화 <아프리카 탈출-Out Of Africa>에서 메릴 스트립이 그랬었다.
죽은 로버트 레드포드의 관에 흙을 뿌리는 장면이었는데,
그녀는 흙을 꼭 쥔채 차마 뿌리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손표정을 보여주었었다.
아주 조심스러워야 한다. 미세한 호흡의 마지막 입김까지 느낄 수 있을 만큼 섬세하게,
가지런하게 펴 있어야 한다. 내가 보기에 저 포옹은 백년만의 포옹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 작품의 제목은 그림보다 훨씬 뒤에 알게 되었는데, '성취'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난 내가 상상했던 제목과 일치한 것에 대해 놀랐다. 그리고 만족감을 느꼈다.
처음 그림에서 받은 인상과 제목의 일치에서 난 이 작품을 정확하게 읽어낼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저 포옹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기다림의 댓가와 같은데,
난 현실이 아님을 확신한다. 현실이라면 클림트는 절대로 저렇게 그리지 않았을 것이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저 견고한 등의 주인공은 죽었다. 저 포옹은 클림트가 대신 해 줄 수
있었던 보상이다. 그는 저 여인의 심상에 잠수해 있는 슬픔의 깊이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은근하고 애절한 포옹이 어느 개인의 식당을 장식하기 위한 벽화라는 사실은
믿기 싫지만 사실이다. 아돌프 스토클레라는 벨기에 실업계의 거물은 대저택을 소유하고 있는데,
클림트의 이 작품은 저택의 식당 벽을 장식하고 있는 벽화의 일부이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벽화를 위한 밑그림이다.
브뤼셀에 있는 그의 저택을 건축하기 위해 일급의 솜씨를 자랑하는 건축가와 장식미술가들이
동원되었다. 오스트리아의 빈 공방은 이 작업의 주요한 인력들이었다.
요셉 호프만이 설계한 이 대저택은 고대양식과 새로운 양식이 혼합된 대단히 사치스러운 저택이다.
저택 식당의 장식적 모자이크 벽화를 담당한 클림트는 <생명의 나무>, <기다림>과 함께
<성취>를 배치한 밑그림을 생각하고 있었다. 클림트가 의뢰받은 마지막 건축미술이었는데,
그의 걸작임에 틀림없다.
실재 벽화에서 금빛 색조의 옅은 대리석이 여러가지 색의 상감기법과 이루는 조화는
장엄하면서도 밝은 색상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클림트는 많은 세부 소묘들을 제작했다.
그의 소묘와 밑그림에 따라 요셉 포스트너의 감독 아래 일년 반 동안 벽화를 제작했다.
나비와 새 등은 빈 공방에서 제작한 것이고 보석은 실재 보석을 상감해서 넣은 것이다.

이 작품은 항상 클림트에게 공격적이었던 보수적 비판자들로 부터 그를 보호하기 위해
1911년 브뤼셀로 보내기 전에는 대중들에게 공개되지 않았다.
포옹하고 있는 남녀를 제외하고 나면 나머지 면들은 지극히 양식적인 장식문양으로 채워져 있다.
장식적 효과를 노린 아르누보 특유의 유장한 곡선이 전면을 유유히 헤엄치고 있고,
동양적인 분위기의 새와 물고기 형상은 빈 공방 특유의 사각형 속에 반복적인
장식 무늬로 새겨져 있다.
손으로 여인의 손과 얼굴, 남자의 목덜미를 가려보면 이 작품은 아무런 볼륨감이 없는
완전한 평면적 장식화라는 것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배경과 인물의 의상은 장식적 문양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여인과 육체

그는 그의 작품을 통해 여인들을 찬미했고 때론 숭배했다.
1890년대 후반부터 그가 주로 다루었던 형상은 여인들이다.
그는 1896년 이후로 남자의 초상화를 아예 그리지 않았다.
그는 여인의 이중성에 집착했다. 여성의 인생에 내재된 보수성과 스스로 자각한
여성해방 의식 같은 것들이다.
그는 시종일관 소수의 '친구'들과 다수의 '적'들에 의해 포위 당해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그림에 나타난 여체의 노골적 관능미가 추잡하고,
변태성욕자의 발작과 같은 것이라고 몰아갔다. 우리는 여기서 그가 살았던
시기가 1800년대 후반기와 1900년대 초반기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가 받은 비난은 피카소나 마티스가 겪어야 했던 '조형'상의 시련이 아니었다.
분명히 그는 노골적이었고, 드러내놓고 관능미와 에로티시즘을 추구했다.
숨기지 않았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그가 보수적 언론과 사회에 의해 십자포화를 맞은 대표적인 작품은 <파쿨태츠빌더>이다.
이 작품은 빈 대학교 강당의 천정화를 구성하는 <철학>, <의학>, <법학>으로 구성되어 있다.
1900년 3월, 제 7회 분리파(뒷장에서 언급함) 전시회에 <철학>이 모습을 드러내자
분리파를 반대했던 목소리와 분노의 목소리는 힘을 합쳤다. 대학이라는 공간에
어울리는 현학적인 우의화를 상상했던 사람들은 당당하게 나체를 드러낸 여인들의
형상에 경악했던 것이다.
1901년 3월, 10회 분리파 전시회에 <의학>이 공개되자 사람들은 클림트가 전혀
반성의 빛을 보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더욱 광분했다. 하원에서 이 그림문제를
다룰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이때 클림트는 그 불길에 기름을 부었다.
노골적으로 엉덩이를 감상자 쪽을 향해 내밀고 있는 <붉은 물고기들>이라는 작품을
전시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클림트는 이 작품의 제목을 '나의 비방자들에게'라고 정했었다.
<법학>이 마지막으로 전시되었을 때도 상황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클림트도 발끈했다. 그는 제작비를 환불하는 조건으로 그림을 돌려받고 싶다는
의사를 문화부에 전달했다. 거절당했다.
베르타 주커칸들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내가 작품을 정부에 인도한다면 그것은 다만 강요와 속박에 의해서일 것입니다"
결국 <파클태츠빌더>는 정부가 포기했다.
실업가 아우구스트 레더러의 도움으로 사례금을 환불했다.
지금 우리는 이 말 많았던 작품을 볼 수 없다. 정부는 1945년, 전쟁으로부터
이 작품을 보호하기 위해 남부의 임멘도르프성으로 옮겼는데, 5월 5일 밤, 전쟁과는
무관한 화재에 의해 소실되었다.

퇴폐적인 작가라는 낙인이 찍힌 그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여인이었을까, 육체 그 자체였을까.
그는 생동적인 육체와 유기적이지 않은 추상적인 장식을 대비시키는 방식으로
생경한 퇴폐성을 표현했다. 이것은 아르누부의 특징이다. 지극히 평면적이고
추상적인 장식문양들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극단적인 사실묘사에 의해 부각 된
여인들의 육체는 음화적 분위기를 더욱 강화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는 이러한 방법을 통해 우선 여성 이전에 육체를 말하고 있다.
그가 쇼펜하우어(A. Schopenhauer)적 인간관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에 의하면 인간이 육체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바로 육체이다.
마찬가지로 성(sex)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인간 자체가 성적인 존재이다.
따라서 육체의 판단은 정신의 판단만큼 완전한 것이며, 육체는 결코 폐기되지 않는다.
결국 클림트에게 있어 육체를 드러낸다거나 성적인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는 사실은
인간존재에 대한 의문과 스스로의 답변이었던 셈이다. 그것은 이중적 내면을 강요받았던
여인들을 통해 외화되었다.
클림트의 여인들은 생동적이고 매혹적이다. 그리고 뭉크의 경우 처럼 위협적이 까지 하다.
그것은 극단적인 성개방주의자들의 성 찬양으로 이해되어서는 곤란하다.
난 오히려 그 반대로 본다. 왜냐하면 그의 그림에 등장한 여인들은 한결 같이 취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적인 욕망이 인간을 구속하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은 그러한 구속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자유를 스스로 요구한다.
이러한 요구는 여성의 힘을 무너뜨리려는 시도로 나타난다. 클림트의 그림에서
남성을 극복한 여인들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남성 또한 그 자신의 육체를 스스로
제거할 수 없기에, 여인들의 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서 19세게 말과 20세기 예술에서 새디즘은 중요한 소재가 될 수 있었다.

"새디즘이란 육체를 소유한다는 사실에 대한 거부이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기존성(facticity)으로부터의 도피이며,
동시에 타자의 기존성을 파악하고자 하는 노력이기도 하다" -사르트르

클림트에게 정신적인 삶이란 비인간적인 삶이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정신적인 삶만을
살 수 없는 것이다.
그도 기다렸다.
그는 1862년 7월 14일 빈 근교의 바움가르텐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바지는 귀금속세공사였다. 그런 피를 이어받은 탓인지 일곱 명의 형제 자매들 중
세명이 미술에 종사했다. 그는 1876년에 오스트리아 미술관 부설 공예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여기서 아카데믹한 미술수업을 체계적으로 받을 수 있었고 장식미술에 눈뜨기 시작했다.

동생인 에른스트 클림트와 친구 프란츠 마츠와 함께 <말러 콩파니>라는 장식미술회사를
1883년에 만들었다. 주로 극장의 천정화와 무대를 위한 벽화를 제작한 이들의 작업은
탁월한 솜씨를 보여주었고 곧 그들을 부와 명성으로 치장시켜 주었다. 1891년에 완성된
미술사 박물관의 계단 장식화는 '황제의 가장 큰 인정'이라는 확고부동한 지위를
부여해 주었다. 1892년 동생 에른스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말러 콩파니>는 해산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보수층에 인기 있는 화가였다.
그는 1890년에 처음 수여된 '황제대상'의 최초 수상자였다.
1897년 4월, 빈의 미술가들은 새로운 조직을 만들었다.
'오스트리아 분리파 미술가연맹'이 바로 그것인데, 클림트는 분리파의 초대회장이었다.
그는 실질적인 리더였고 분리파를 대표하는 화가였다. 분리파는 독단적이고,
혁신적인 것에 대해 적대적이었던 자만에 빠진 기존의 미술가협회를 부정한 단체였다.
그가 받았던 비판도 사실은 작품뿐만 아니라 분리파에 대해 적대적이었던
기존의 미술계의 심정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었다.
1905년 봄, 클림트와 열여덟 명의 분리파 예술가들은 분리파를 탈퇴한다.
분리파 내의 상대적 다수파인 ‘자연주의파’는 클림트의 양식주의적 작업경향과 방식에
대해 상대적인 열등감과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클림트그룹은 '오스트리아 미술가협회'를
조직했다. 항상 과묵했던 그였지만 그의 동료들과 함께 했던 선택의 순간엔
이렇듯 중심에서 그룹을 이끌었다.

미술가로서 그는 항상 화제와 문제의 중심에 서 있었다.
는 침묵을 사랑했지만 공적인 그의 활동은 항상 요란한 언론의 스포트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상당히 부르조아적이었다. 공적인 활동 이외의  그의 생활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상류사회 귀부인들로부터 환영받는 탁월한 초상화가였다.
사실 그의 작품은 지극히 고급스러운 감각으로 치장되어 있고 그도 그것을 노골적으로 추구했다.
그의 작업이 차지하고 있는 미술사적 의미도 여타의 거장들 처럼 혁신성이나 진보성에 있지 않다.
그 이전엔 고호와 고갱이 있었고, 동시대엔 피카소와 마티스, 로댕이 있었다.
그의 뒤를 바로 이어 미술사적인 열매를 따먹은 이는 에곤 쉴러와 코코슈카가 될 것이다.
그는 혁명가도 아니었고 전위화가도 아니었다. 회화의 미래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하지 않았다.
그는 자체로 시대와 회화사의 과도기였다.
지금에 와서 그의 그림에 사람들이 집중하는 이유는 20세기 회화가 대중의 감성을 뒤로 하고
자신의 길을 가버린 빈들에 남아 있는 생경한 소나무와 같은 그의 감성때문일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철저한 솜씨에 의해 만들어진 볼꺼리를 제공한 몇 안되는 '보수적 혁명가'이다.
여인들의 형상에 가려진 그의 풍경화는 이런 심증을 더욱 굳게 만든다.
그는 여름이면 아터제 호숫가에서 일년의 절반을 보냈는데, 이 기간 동안 그는 요란스러웠던
빈에서의 반년을 털어내었을 것이다.
그때 그는 집중적으로 풍경화를 그렸다. 빈으로 돌아가서 다시 여인들을 그리기 위해서일까?
그는 아이러니칼 하지만 너무 당연하게도 독신으로 살았다.
그가 진정으로 사랑한 여인은 에밀리 프뢰게였다. 1918년 1월 11일, 그가 갑자기 발병했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에밀리를 가장 먼저 찾았다.
"창작을 하기 위해서는 그의 개인적인 자유를 지켜야만 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여기에서 '클림트는 왜 에밀리와 결혼하지 않았나'라는 물음에 대한
아주 간단한 대답을 얻게 된다"
이 아리송한 후세의 결론은 도대체 무슨 말일까.
누구보다 여인들을 많이 그렸던 그는 12월 6일 독신상태 그대로 사망했다.
생전에 클림트의 배려속에서 작업했던 에곤 쉴러는 그의 임종을 지켰고
그의 마지막 모습을 스케치로 남겼다.
그의 예술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여기에 대해 또렸하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이것만은 분명하다.
아름다움으로 가득찬 육체의 심연속을 유영하는 인간들을 등장시킨 그림,
대책없이 펼쳐진 꽃밭 위에 무릎을 꿇고 주변의 세계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입맞추는 연인,
바로 이것이 바로 클림트라는 사실이다.

분리파전당 입구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다.

"각각의 시대에는 그 나름의 예술을, 그 예술에는 나름의 자유를"

그는 자유로웠다. 그리고 나름의 예술세계를 만들어 나갔다.
나는 그가 현실에서 행복했던 몇 안되는 작가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가 사랑만했고 포옹하지 않은 채 세상을 마감했다는 사실을 어쩌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도 역시 마침표 보다는, 상상할 수 있는 여분의 기다림을 즐겼는지도 모른다는...


작품; 성취(Fulfilment)
작가;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
재료; 혼합재료
크기; 194.5 X 120.3 cm
제작; 1905-1909
소장; 오스트리아 응용미술관/빈

4dr@naver.com


서버에 요청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