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2.18

이전에 사진만 올리고 글을 올리지 않았던 영화 代父2 를 며칠간 야금 야금
채워 넣다가 오늘 마감했다. 다시 위로 올리고 이전 것은 리스트에서 삭제했다.






몇년간 본 대부 시리즈는 1, 2편 구분이 없는 시간순으로 편집된 것이었다.
92년 초에 나온 것인데 극장판 1, 2편에서 보여주지 않았던 40분 정도가 더 추가된
감독편집본이다. 이것으로 보다보니 극장판의 순서 개념은 없어지고
그냥 화면에 흐르는 시간에 눈을 던져 둔다.
하지만 이곳에서 이야기는 극장판 2편으로 해얄 것이다.
최근에는 DVD로 보았는데 앞서 이야기한 편집본과 순서가 다르고 추가된 40분이
다시 없어진 관계로 좀 어색한 점은 있다.

1편에서 알 파치노가 이왕 히로인이 된 마당에 2편의 신성은 드니로였다.
성난황소와 비교하면 대략 20kg 은 감량을 했을 것이다.






비토 안돌리니는 시실리섬의 꼴레오네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1901년, 그의 아버지는 시실리 본토 마피아 두목인 돈 치치오를 모욕했다는 죄로
살해되었다. 어린 꼴레오네의 형 파올로는 아버지의 복수를 맹세하는데 역시
아버지의 장례식 도중 살해당한다. 이때 꼴레오네의 나이가 아홉살 인생이다.
어머니의 기지랄지 희생이랄지, 여튼 모든 직계가족을 잃은 어린 꼴레오네는
주변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대부 2편은 혈혈단신으로 가족을 만들어 가는 꼴레오네(드니로, 또는 브란도)
와 세월이 흘러, 만들어진 가족을 해체해 가는 마이클(알 파치노)의 모습을
교차로 보여준다.
대부 2편은 가족에 관한 영화다. 형성과 해체.
그렇게 표현하여서는 안될 영역을 말이다.






지금 미국비자 얻기를 생각해 보면 영화에서 표현된 시기 미국은
무한정으로 다양한 인종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희망의 땅' 이라는 표현이 헛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3~4년 전 무렵 중국을 드나들었던 내 친구는 당시 중국에 가면 동종업계의
사장들로부터 칙사대접을 받았다. 자신들이 만든 싸구려 유리를 구입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 중국에 가면 그 당시 허리를 굽혔던 중국인들은 면담도
힘들다. 수삼년 사이에 그들은 중국의 신흥 갑부가 되어버린 것이다.
시장의 잠재력이란 그런 것인가 보다.






이태리계 미국이민사를 보는 기분으로 영화의 초반을 감상하면 될 것이다.
이탈리안 거리가 만들어지고 시장과 거리는 혼재되어 뒤범벅이다.
촬영장소는 기존의 거리를 완전히 개조한 대대적인 공사를 통해서 가능했다.
잡화점 친구와 함께 간 극장씬에서의 밑바닥 정서의 공연이나
음식 풍경, 사람들의 성격, 음악을 통해서 이태리는 충분히 재현되고
그들이 왜 혈연을 중요시할 수밖에 없는지에 관한 충실한 영화적 장치로 작용한다.
영화의 힘은 뜻밖에 나에게 이태리 음악과 이태리 음식에 대한 선망을
불러 일으키고 급기야는 동질감까지 유발시키니 설득 수준으로 보자면
탁월한 것이다.






필요가 강렬할 때 인간은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을 구분하지 않는다.
동서를 막론하고 싸움의 발단은 밥이다.
직장 쫓겨나고 자식새끼 아픈데 고상함과 자존심을 유지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어차피 영화는 밝음 보다 어둠을 쫓는데 계몽주의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밝음을 쫓고 노력하고 성공하는 장면을
보여주면 왠지 민방위 교육장에 온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일 것이니
흥행이 될리가 없다.
참 희안하다. 되는 영화는 고통을 수반하는데 현실에서의 고통도 모자라
사람들은 어둠을 쫓는다.






영화에서 드니로가(꼴리오네) 싸움에 탁월한 사람은 아니다.
대개의 갱 영화에서 오야붕은 뭔가 필살의 살인무기를 가지고 있는데
대부에서 오야붕의 필살기는 결단과 신의다.
제 정신은 아니다. 아무리 악당이라고 해도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데
그렇게 냉정하고 정교한 감성으로 결행하기란 쉽지 않다.
짐작컨데 그 모든 떨림과 갈등은 속으로 삼켜버렸을 것이다.
그때 목젖이 타 들어가는 갈증을 느꼈을 것인데, 그 순간에도
냉정을 잃지 않는 것이 대부에서 오야붕의 자질이었다.
이제 길로 들어 선 것이다.






요즘도 저런 식의 복수가 가능할까.
고전적 폭력이랄까 뭐 그런 것 말이다.
살인에도 전통은 살아있고 그 전통을 지키면 그 바닥에서
명성이 자자해질 것이다.
수십년이 지나서 해묵은(하지만 잊을 수 없는) 복수를 결행했으니
건드리면 좋지 않을 것이라는 인상은 충분히 심어 준 것이다.
이 모든 살인이 '가족을 위해서' 였다.
가족을 위하는 방식은 세월이 흘러 그 아들에게 와서
다른 방식으로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이 배우가 마음에 든다.
이 장면에서 주먹을 꼭 쥐고 '나를 보고 웃었던 것은 기억난다'는
빈곤한 변명을 하던 모습과 지옥의 묵시록 초반 식사 장면에서
마론 브란도의 녹음테입을 듣던 모습이 인상적인 연기였다.
대부에서 항상 만족스러운 점은 이런 조연들의 배역이 아주 적절하다는 것이다.
물론 3편에서 소피아 코폴라와 엔디 가르시아는 당황스러운 것이었지만...






여튼 하이만 로스는(나는 왜 느닷없이 '여튼' 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할까?)
유태인이다. 하이먼 로드스테인이란 이름을 젊은 비토꼴리오네(마론 브란도)가 지어주었다.
이 사람의 생존비결은 항상 이익을 친구들과 나누는 것이라고 했다.
역 전반에서 그는 특별한 악당은 아니다. 꼴리오네家와 비교해서 말이다.
자주 등장하는 말 그대로 그들의 악행은 '비지니스'다.
이 처엄 보는 노배우는 이후 다른 영화에서 본 적도 없지만 강단진 노인 역할을
잘 소화한 것 같다.
유태인을 영화의 중심 악역(이견은 있지만)으로 등장시킨 영화는 흔치않다.
영화에서 그는 쿠바에서의 발작 도중 '영어를 할 줄 아는 의사'를 요구하는데
이것이 그의 한계였다. 힘들었던 시절로의 회귀를 거부하고 그 기억 조차 되살리고
싶지 않은 포괄적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자신 스스로 중심에 군림하는 것.
미국이 아닌 모든 나라는 변방이라는 인식.
결국 중심으로 돌아오려는 이해하기 힘든 영화적 상황에서 그는 죽는다.






바둑이의 설명에 의하면 파탄젤리는 원래는 계획에 없었던 사람이다.
1편에서 클레멘자 역할을 했던 뚱보아저씨가 2편에서 많은 출연료를 요구해서
시나리오를 수정하고 엉뚱하게 파탄젤리라는 클레멘자 유사한 이미지의(몸매)
사나이가 등장한다.
나는 이 연기자에게 만족한다.
어쩌면 1편에서 클레멘자 보다 이 영감의 연기에 더 만족한다.
구식 갱의 전형을 보여주는 케이스인데 알 파치노 아버지 세대의 갱이 아닌가.
하지만 위의 유태인 하이만 로스와는 다르게 세월의 변화를 따라 잡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메인스트림의 갱이 될 수 없었고 비극적인 구식갱의 마지막을 연기한다.
사람을 사귄다면 이런 사람이 좋을 것이다.
나는 아직도 그가 술집에서 죽음의 문턱에서 빠져나오는 장면이
하이먼 로스의 장난인지 알 파치노의 장난인지, 두 거물 합작 전술인지 구분하지 못한다.






로버트 듀발을 좋아한다.
특히 지옥의 묵시록에서 전쟁광 대령으로 나와서 시체 위에 카드를 날리던
모습과 'smell's like victory' 라는 대사를 몸을 부르르 떨면서 연기하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워낙 대부에서의 차분한 고문관 이미지가 강한 배우인지라 지옥의 묵시록에서
그런 모습은 나에게는 놀라운 것이었다.
우리나라 영화에서 연륜 있게 조연 역할을 할 수 있는 배우가 얼마나 될까.
너무 자주 같은 배우들을 보다보니 좀 회의적이다.
변희봉과 백윤식이 최근에 각광을 받았지만 잘 찾아보면 충분히 그런 능력을
가진 연기자들을 어렵사리 구할 수 있을 것 같다.
내 머리 속의 리스트로는 그렇다.






연기자로서 다이안 키튼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는다.
탁월한 연기자라는 느낌을 받은 적도 없고 탁월한 미인이라는 느낌도 받지 않았다.
최근 잭 니콜슨과 함께 연기한 뭔 노친네들 사랑이야기 영화는 그다지 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동서양의 미감에 따라 선호하는 얼굴형 또는 관상이 있을 것인데 이 여자는
전반적으로 얼굴의 집중성이 부족하다. 바라보면 시선을 분산시키는 얼굴이다.
그나마 3편에서 늙은 케이역은 그럭 저럭 마음에 들었다.
또 한가지 교훈은 남자들은 젊을 때 조강지처에게 잘 해야 한다는 것이다.






쿠바에서 자신의 가족을 살해하려했던 일당이 하이먼 로스라는 사실과
그 매개 역할을 한 것이 자신의 친형 프레도라는 것을 알고 돌아 온 마이클에게
마누라 케이는 자연유산이 아닌 인공유산을 시켰다는 사실을 통보하고 이혼을 요구한다.
유산한 아이는 아들이었다.
전편을 통털어 가장 분노한 마이클의 모습이다.
정신적으로 가족을 잃었고 물리적으로도 잠재적 가족을 잃었다.
이 영화의 화두는 가족이다.
알 파치노의 눈동자 굴리기 연기는 이 장면과 히트에서 차 한잔 마시며
드니로와 대면하던 장면이 인상적이다.






평생 철 들것 같지 않았던 누이 탈리아 샤이어(Talia Shire)는
2편 말미부터 정신을 차린다.
이 남자 저 남자에게 버림 받고 나서야 가족의 소중함을 알게 된 것이다.
동생인 마이클 앞에 무릎을 꿇고 '거두어 줄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마이클의 친형인 프레도(존 카잘)을 용서하고 받아 줄 것을 청원한다.
'그래도 니 형이지 않냐'
영화 상의 한 요소로(갈등의 숙주로) 작용하던 배우는 비로소 이 장면에서
스스로를 표현한다.
실베스타 스탈론의 록키에 여주인공으로 나온 것은 그리 잘 못한 일은 아니다.
록키 1편은 그럭 저럭 괘안은 영화다.






연기자로서 존 카잘을 좋아한다.
영화 디어헌터에서도 마음에 든다.
디어헌터나 대부에서나 그는 보잘 것 없고 별 볼 일 없는 역할을 배당받는다.
주목 받지 못하는 사람,
뭘 해도 잘 안되는 사람,
중요한 일은 절대 맡을 수 없는 사람,
"난 네 형이야"
라는 대사가 1,2편을 통털어 가장 통렬한 장면이었고
존 카잘의 본심이었다.
만약 그에게 꼴리오네 일가의 운명을 맡겼다면 어떠했을까?
꼭 실패했을까?
중요한 것은 사람들은 능력으로서 그를 믿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한 인생에 있어 참으로 고통스러운 지점이었을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도 자주 만나는 대목이다.
'나는 할 수 있는데' 남들은 알아 주지 않는 것 말이다.
하지만 그 역할을 선점하는 것은 항상 객관적(이 망할놈에 객관) 데이터에 근거한
평가이다.






프란시스 코폴라 감독은 고전적이다.
저런 포옹씬에서 카메라를 서서히 줌인 하는 것은 세련됨을 추구하는 감독들은
잘 구사하지 않는 방식일 것이다.
그가 뭔 3~40년대 감독도 아니고 말이다.
지옥의 묵시록을 찍던 도중 정글에서 코폴라는 그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혹시 나는 천재가 아닐까?'

이 포옹을 하는 중 알 파치노는 부하 '알'에게 눈짓을 보내고 알은
고개를 숙인다. 그때 우리는 프레도가 죽게 될 것이라는 것을 예감한다.
그런 상식적인 사인이 나는 좋다.






결국 마이클(알 파치노)의 가족 지키기는 실패했다.
스스로 친형을 살해하는 것으로 막을 내린 가족 지키기는 표면적으로는
당장의 몰락과 최악의 붕괴를 저지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기를 잘 한다.
누구나 붉은 꽃이 핀 착한 주교의 뒷뜰이 있다면 피를 토하는 고해성사를
쏟아 낼 것인가...

4dr@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