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dr Date : 2004/10/05


2004.10.5

대략 3년 정도 만에 느닷없이 걸려 온 전화를 받고
딱히 만나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지만 그렇게 만나고 싶지도 않은
그런 만남을 오후에 가졌다.
만남도 의무방어전 같은 것이 있는데 오늘과 같은 케이스가 그럴 것이다.
애시당초 피하고 싶었던 것은 나에 대한 수년간의 정보가 내장되어
있지 않은 사람을 앞에 두고 다시 그놈에,
'서울은 어떻게 오게 되었나'
'직장은 어떻게 그만두었나'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나'
'결혼은 했나'
등등을 일일히 되새김해야 한다는 지겨움이 예상되는 자리였다.
역시 만남은 나의 예상을 한치도 벗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진행되었다.
어제 밤에 갑자기 일산으로 올라가면서 느낀 한기와 몸살기운을
초기에 제압하기 위해 일산에서 돌아오는 길에 약국에서 감기약을 구입해서
지난 밤부터 나는 내 몸에 쏘아대기 시작했다.
아시다시피 대한민국 감기약은 '약하게 해주세요' 라는 요구를 하지 않을 경우
거의 환각제 수준인데 역시나 지난 밤 내가 비교적 이른 시간에
잠을 잘 수 있었던 것도, 오늘 낮 동안 멍한 상태로 땀을 삐질거리면서
입술과 입안이 마르고 집중력이 확 떨어진 것도 이 감기약 때문일 것이다.
자... 이런 몸 상태에서 나는 두시간 삼십분 정도의 시간 동안
앞의 '예상을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 대화를 나누었다.
초반은 몇년 만에 만난 사람들이 나눌 만한 신상의 변화에 대해 정보를 교환하니
나도 입을 열고 말을 할 장면이 있었다.
어느 정도 스파링 수준의 땀빼기가 진행되고 본격적인 고문이 시작된다.
가장 피곤한 대화는 상대방의 상황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머리 속에 있는
이야기꺼리를 쏟아내고야 마는 스타일이다.
더구나 그런 사람이 시간까지 넘쳐나게 많다는데...
대부분의 피곤한 스타일들은 자신의 최근 관심사에 대해 상대방에게
설명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한다.
전혀 엉뚱한 분야에 대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제?'라는
확인성 질문에 고개를 까딱해야 하는 시간은 정말 피곤한 것이다.
감기약은 사람을 몽롱하게 하고 시간은 무지하게 안가고
상대방은 오래간만인데 당연히 저녁이라도 먹고 술 한잔 하면서 무한정
대화를 이어갈 태세를 공공연히 노출하고...
한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나의 시선은 까페의 지나가는 사람들 얼굴로
옮겨다니기 시작하고 입술은 굳게 다물어 진다.
다행이 몇차례 터져준 핸드폰 덕분에 이후 약속이 있다는 뉘앙스를
풍기면서 마침내 그 자리를 빠져 나왔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나는 완전히 뻗어버렸다.

'氣가 빠져나간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어떤 만남은 그를 만나고 나면 에너지가 생긴다.
어떤 만남은 그를 만나고 나면 기가 빠져 나가는 기분이다.
남녀를 불문하고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고
남녀를 불문하고 만나기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
피곤한 이야기다.
네그로폰테의 '디지털이다' 라는 책을 읽어보면
펄스(pulse) 신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주파수의 모양만 보고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는 시그널을 읽어내는,
그리고 그 시그널에 눈물을 흘리는 세상이 올 것이라고.
피곤한 만남은 펄스신호로 대신했으면 한다.    

4dr@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