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dr Date : 2004/10/30
2004.10.29



예정되어 있었던 길을 나섰다.
추석 성묘를 미루어 두고 있었는데 계획했던 것 보다 1주일 늦게
길을 나서게 되었다.
영후 학교를 보내고 출발하니 남부터미널에서 오전 10:00 버스를
타기가 그렇게 여유롭지는 않다.
개인적으로도 지난 여름의 지리산행 이후 업무 이외의 장거리는 처음이다.






어머니께는 거짓말을 했다.
지난 봄에 산소를 다녀왔다고.
선의의 거짓말이다.
나는 통상 일년에 세번 정도 산소를 가는데 금년에는 구정 이후 가야 할
시기를 놓쳐버렸다.
산소 가는 것을 빼 먹고 사는 것은 나에게 정신적으로 좋지 않다.
아버지 살아 계실 때 많이 다투어서 그런지 나는 산소 앞에서
이상하게 평화로운 마음이 된다.
왜 그렇게 불화하였는지.
산소 마주보이는 멀리 대전-진주간 고속도로가 생겼다.
외출하기 좋아하셨던 분인데 누워 계신 곳 앞으로 고속도로가 생겼으니
이런 저런 생각이 많으실 것이다.
이 산소는 택시에서 내려 일분 거리의 언덕에 있다.
그래서 아주 방문이 부담스럽지 않다.






이제 산 위에 있는 양아버님과 큰아버님 산소를 뵙기 위해
간략한 등산길에 나서야 한다.
산을 오르는 초입에 까치밥 하나 대롱 매달려 있다.
하늘 맑고 감 색깔 또한 선명한 주홍색이다.






대략 20분 정도 산을 오르면 산소가 나온다.
여름이면 나는 이 산소를 찾다가 실패하고 그냥 내려오곤 한다.
벌초 전의 이 산은 밤나무와 아카시아, 잡목으로 길인지 풀밭인지,
산소인지 풀밭인지 구분을 할 수가 없다.
상석만 있고 비석 없는 묘를 찾기란 그래서 쉽지가 않다.
가을볕에 쇠락한 생명력의 잡초들은 반짝인다.
이 산을 오를 때 마다 나는
'왜 이곳에 산소를 모셨나' 하는 불만을 거듭하지만
원래 성묘라는 것이 끝내고 나면 흘린 땀 만큼 홀가분한 것이다.
이 산에 모셔 놓은 두 형제분은 6.25 때 빨치산의 총을 맞고
한분은 그 자리에서, 한분은 이틀 후에 돌아가셨다.
이 산 자체가 이태의 남부군을 읽다보면 등장한다.
아마도 후빨치 무렵이었을 것이다.
대학에서 처음으로 이런 역사인식을 하고 이 산소를 찾았을 때
나는 아마도 거의 처음으로 가족사와 나를 연관짓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후부터 나는 산소를 찾는 일을 억지로 하는 관례적 행사가 아닌
내가 해야만 하는 몇가지 의무 중의 하나로 받아 들였다.






이번 성묘길은 윤진이 동행했다.
윤진이 산소를 찾은 것은 물론 결혼을 한 이후 인사길에서 였고
이후 이런 저런 사정으로 동행을 하지는 않았다.
일상적으로 성묘는 남자들의 몫이었고 시골에 연중 꼭 한번은 인사를 해야 할
친척이 있는 것도 아니니 항상 홀가분하게, 기동력 있게 혼자 움직였다.
원래 성묘하고 나는 지리산으로 움직일 계획이었다.
나의 이런 일정은 어차피 고정불변인데...
금년 가을은 유난히 서울 하늘 조차 맑은 듯 하다.
여자라 그런가, 뭔가 나들이를 하고 싶은 눈치가 역력한 윤진을
그냥 못 본채 넘어가려니 나홀로 성묘 빙자 지리산행이 영 게운치가 않았다.
그래서 이번 성묘는 둘이 함께 간다는 방침을 정하고 사전 정지 작업에 들어갔다.
김섬이 희생양으로 낙점되었고 나는 김섬에게 대략 일주일 전에 메일을 날렸다.
은평구민의 의리상 나의 청을 거절할 수 없었던 김섬은 결단을 내렸다.
영후를 돌보면서 일박 이일 동안 집을 지키기로.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사이트를 내려버리겠다는 등의 협박은 결코 하지 않았다.
함양에서 남원으로 넘어 가는 국도는 제법 아름답다.
산길을 돌고 돌아 남원인데 항상 평일에만 움직이는
나의 철칙에 따라 이번 여행길도 도로는 한적하고 버스는 날아 다닌다.
차창으로 스쳐 지나가는 색의 향연이 호사스럽다.






산소가 있는 산청군 단성면에서 구례로 가는 길은 두갈래다.
진주-하동-구례를 잇는 길이 있고, 이것은 남행이다.
함양-남원-구례를 잇는 길이 있다. 이것은 북행이다.
북행이 더 멀다.
하지만 이날은 북행을 택했다.
남원에서 전주의 만규형(http://www.soomuk.com)과 도킹을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한달여 전에 만규형이 서울에 오셨을 때 성묘 후 지리산행
이야기를 듣고 동행을 청하셨기 때문이다.
몇년간 섬진강만 그리셨는데 문수골 형제봉에서 내려다 보는
섬진강을 아직 보지 못하였고 함께 등산을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고.
물론 이번 기회에 지리산형과 전주 만규형을 연결시키는 것 또한
만남의 목적이다. 진작에 만났어야 할 두 형이다.
전주에서 출발한 형이 차를 가지고 남원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해지는 터미널 앞 남원의 색깔이 좋다.






목요일 아침 문수골 옆 형제봉 정상이다.
흔히들 이야기하는 지리산의 유명한 형제봉이 아니라 문수골의 형제봉이다.
해발 900m 정도되고 우리는 새벽 6:30분에 해발 600m 정도 지점에서 출발했다.
등산로 초입까지 지리산형의 가이드가 있었는데 거의 사람들이
오르지 않는 길이고 초행이라 가이드가 필요했다.
지리산형은 아침에 형수님과 민준이를 구례읍으로 출근, 등교 시켜야 하니
전체 동행을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한가지 말을 해 주지 않고 먼저 내려갔는데...
시작부터 끝까지 45도 정도의 경사면을 유지하는 측면 공격이라는 사실을.
능선을 타고 넘는 등반은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하면서 호흡을
가다듬을 여유를 가지는데 새벽 5:40분에 눈을 뜨고 세수하고,
몸이 깨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산의 측면을 타고 오르는 등반은
간만에 거친 호흡을 유발시켰다.
더구나 앞장 선 만규형은(지난 여름 지리산행에 동행한 나와바리 친구들은 장구목을
기억할 것이고, 그곳에서 작업 하시는 선배 한분이 계시다는 나의 이야기를 기억할 것이다)
올해 쉰살이라는 세월에도 불구하고 절제된 생활 탓인지 딱 두번 2분 정도 쉬고
쉼 없이 그 가파른 산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좀 쉬었다 갑시다'는 소리가 목구멍 까지 치고 올라왔지만
'저 영감탱이가 장구목에서 뱀만 잡아 먹었나' 하는 오기가 생겨 끝까지 따라 올라갔다.

고통 뒤에 산은 항상 기막힌 비쥬얼을 제공한다.
내 고무줄 카메라의 한계를 절감할 다름이다.
지난 밤, 지리산 형은 날씨가 포근하면 운해가 보일 것이고
쌀쌀하면 강이 보일 것이라고 예견했었다.
운해가 깔렸다. 운해가 깔린 지점이 바로 섬진강이다.
계절도 아닌데 형제봉 정상에서 철쭉이 우리를 반긴다.
출발할 때는 어둑했는데 한시간 십분 정도의 쉼없는 산행 끝에 도달한
정상에서 산은 아침을 맞이하기 시작했다.






정상에서 내려다 보면 앞의 사진이고 뒤돌아 보면 이 장면이다.
멀리 노고단이 보인다.
이어진 능선을 따라 5시간 정도 등반을 하면 노고단에 도달할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코스는 아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노고단 쪽을 바라보고 담배를 한대 피워 물었다.
나는 항상 지리산의 저 굴곡진 등뼈를 좋아한다.
작년 11월 만복대에서 보았던 허한 등뼈가 생각났다.
http://www.iam1963.com/bbs/view.php?id=day&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25






송만규.
옛 민족민중미술운동전국연합 공동의장.
홍성담 형과 함께 조직을 이끌었다.
성담이 형과 정반대 스타일이다.
온화하고 섬세하고 묵묵하고, 무엇보다 나는 지난 10년 이상의 시간 동안
형이 화 내는 것을 보지 못했다.
궂은 일을 많이 하셨다.
남도와 북도의 차이일까, 형은 말씀이 느리고 진중하다.
무엇보다 편하다.
윤진과의 결혼식에 초대한 다섯사람의 손님 중 한분이다.
몇년간 섬진강만 그리셨다.
70년대 기독교운동부터 시작하셨으니 운동의 세월로 보자면
참 질긴 형이다.
89년 민족해방운동사 수배시절과 서울민미련에 대한 전원 구속을 겪을 때
형은 참 힘들었다. 형수는 당시 전교조 활동으로 해직상태였고.
91년 어느날 전주의 그 조그만 형의 시영아파트에서 전원 수배 중이었던
민미련 중앙위원회를 진행하는데 나는 형의 집에 쌀이 떨어진 것을 알았다.
아파트 입구에서 안주거리를 산다는 핑계로 나는 주섬 주섬 식용품들과
쌀을 주워 담았다.
옆에 서서 '뭣하러...' 하고 말끝을 잇지 못하던 형을 기억한다.
내가 아직도 어떤 지점에서 꼭지가 확 돌아버리는 경우는
80년대에 무엇을 했다고 주장하는 좆도 한 것 없는 유명인사를
미디어를 통해서 보는 경우인데, 나에게는 만규형님 같은 분이 계시다.
남은 세월 만규형이 한나라당에 입당해도 나는 욕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그것을 보고 누군가 욕을 한다면 나의 날이 선 손톱으로 눈알을 빼 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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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은 좌측의 산능선을 뚫고 올랐고 산은 완전한 아침을 맞이하기 시작했다.
한동안 말없이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 보는 것 이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는가.






다시 뒷편으로 몸을 돌려 저 멀리 아랫편 문수골 계곡이
아침을 맞이하는 광경을 본다.
사진 위쪽 골짜기로 난 길 어디 쯤이 지리산 형의 집일 것이다.






윤진은 한참 동안 아침이 만들어지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이런 아침을 맞이하기란 일생을 살면서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이런 풍경은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알 수 없는 어떤 힘을 부여할 것이다.
자주 볼 수 없기에 뇌리에 집어 넣기 위한 눈의 갈구는 애달프다.
한편 그녀의 남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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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위기 있는 모습으로 가을을 한껏 표현하고 있다.















오르는 길이 네발에 의한 것이었다면
하산길은 두발과 엉덩이를 이용한 것이었다.
낙엽은 이미 수북해서 미끄러웠고 윤진과 나는 이번 등반을 우습게 보고
등산화를 준비하지 않았다.
나무가지가 이번 하산길 보다 고마웠던 적이 있었는가.
나무들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굴러 내려왔을 것이다.

그 중간 중간에 나는 멈추어 서서 숲속으로 아침햇살이
스며드는 황홀함 때문에 카메라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사진으로 표현할 수 없는 아침 숲의 색깔은 상투적이지만
별 다른 표현 방법이 없다보니...
감동적인 것이었다.






지리산형 옆집 쌍둥이네 쌍둥이들이다.
네살이다. 애들이 좀 작은편이다.
녀석들은 모를 것이다.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곳이 얼마나 환장하게 멋진 곳인지.






산행을 포함한 이번 여행에서 내가 느낀 것은
가을은 풍성하다는 것이다.
지리산형 앞 마당이다.
모두 이 집에서 소비할 먹거리들이다.
콩을 아직 털지 않았다고 궁시렁 거렸는데 내가 일을 할 줄 아나...






형이 키우는 세마리 개 중 가장 작은 놈인 밤톨이다.
5개월 정도 된 놈이고 아주 순하다.
지난 번 봄 남도 방문 때 사진을 올렸던 누렁이 놈은 귀향을 갔다.
http://www.iam1963.com/bbs/view.php?id=day&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26
이별을 한 것이다.
닭을 잡아 먹기 시작하면서 형과 사이가 벌어진 이후
형의 갖은 노력에도 다시 진심으로 주인을 섬기지 않았기에
형이 결국 포기해서 다른 집으로 보내버렸다.
이후 다른 개들이 세마리 들어왔다.
밤톨이는 그 중에서 막내다.






다시 지리산형의 밥상이다.
오늘은 찬이 쪼까 부실하네.
보통 15가지는 올라오는데 10가지 밖에 안되네.
사랑이 식은 것이지.
아침상이니 내가 인자한 마음으로 참기로 한다.
멸치를 제외하고 모두 형의 밭과 산에서 난 것들이다.
아무런 농약을 하지 않았다.
유기농을 넘어서 자연농법이라고 한다.
그냥 뿌려두고 기다리는 농법.
따지고 보면 그 많은 유기농산물이 어디 제대로 된 유기농산물이겠는가.
어떻게 그 많은 수요를 다 감당한단 말인가.
다만 50%의 순도는 지켜야는데 그것이 힘들다고 한다.
유기농산물의 90%는 제대로 된 유기농산물이 아니다.
해남에서 고추농사 짓는 선배의 전언에 의하면
농심(農心)은 없어진 개념이란다.
형의 고추밭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번 여름에도 농약에 본드를 타서 뿌렸단다.
비에 농약이 씻겨간다고.
그래서 일년에 몇차례 지리산 형의 집에서 받는 형수가 차린 밥상은
숭고한 밥상이다.






형의 집 큰방에서 바라본 풍경이다.
맞은편 골짜기는 단풍이 짙어 가고
공기는 상쾌한 차가움이다.






지리산형은 지리산닷컴이라는 원대한 온라인 구상을 가지고 있다.
일본 8년 생활을 접고 돌아 온 이유도 지리산 때문이다.
2002년 봄에 영구 귀국했으니 2년이 지났는데 이런 저런 농사일로
얼굴은 영락없는 농부의 얼굴로 뱐했고 탄탄한 몸을 가지고 있다.
형은 한발씩 자신의 계획으로 접근 중이다.
3년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형의 계획은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 계획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이다.
항상 내가 지리산으로 내려가서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는 것은 형이 있기 때문이다.
지리산 이야기로만, 구례, 하동, 남원, 함양, 산청군.
지리산을 둘러 싼 다섯개 군을 하나의 온라인 벨트로 묶어내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만의 이야기로만 만들어지는
지리산 커뮤니티,
지리산 농민들이 직접 운영하는 비영리 쇼핑몰,
지리산 온라인 방송.
그것은 결론적으로 온라인 지리산 꼬뮨이 될 것이다.
내 손으로 그것들을 기획하고 디자인 하고 싶다.
그래서 나의 지리산 방문은 그냥 바람맞이가 아니다.






아침을 먹고 이야기들을 나누고, 지난 밤부터의 대화에서
두 형은 이미 서로를 잘 이해하고 격이 맞다.
차를 달려 섬진강변을 거슬러 올랐다.






차가 멈출어 선 곳은 2002년에 지리산형에 의해 광주에서부터 납치되어
2박 3일 지리산닷컴 브리핑을 받을 때 첫 방문지였던 오山 꼭대기 사성암이다.
이전에 휴먼아이 게시판에 이곳에서의 사진을 몇장 올린 적이 있다.
지리산 덩어리 건너편이 되는데 이곳에서는 한눈에 구례를 내려다 볼 수 있고
270도 정도의 시야를 확보한 상태에서 섬진강을 굽어 볼 수 있다.
광각렌즈로 세장 정도 찍고 연이어 붙여야 이곳 풍광을 전달 할 수 있을 것이다.
만규형은 이곳에서 사진을 찍고 스케치를 했는데 이 드넓은 전개도를
내년 쯤에 볼 수 있을까.






구례장이다. 3일과 8일이다.
밧데리 아웃상태여서 사성암에서 사진찍기를 멈추었는데
읍에서 다시 밧데리를 구입했다.
그래도 시골장이라 못보던 물건과 먹을거리들이 많다.
시골장 구경하기도 간만이다.
집이 가깝다면 나는 서대와 참게를 저녁거리로 망설임 없이 구입했을 것이다.






장거리 국밥집은 만원이다.
농사는 지어도 확실하게 답이 보이질 않는다고 한다.
농산물 가격은 너무 낮고 도시에 사는 우리들은 물가가 비싸다고 아우성이다.
농사만으로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장거리는 여전히 드넓었지만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저들의 꿈은 열에 아홉은 도시로 간 자식새끼들의 성공에 있을 것이다.
우리가 먹는 상추, 고구마, 감자, 배추, 무우...
어느 것 할 것 없이 전부 외국에서 수입한 종자들이다.
토종종자가 사라졌다.
그래서 따지고 보면 순수한 의미의 우리 농산물은 거의 없다.
일본에서 들여온 상추씨는 풍부한 수확을 보장하지만 두번은 수확할 수 없도록
유전자 조작을 해 놓았다. 네덜란드, 덴마크에서 들여 온 수입종자도 한가지다.
오직 한번만 뿌릴 수 있고 한번만 거두어 들일 수 있다.
이제 토종종자는 전체 농산물의 30%를 넘지 않는다.
농사는 끝장난 산업인가.






저녁 7:30분 쯤에 연신내에 도착했다.
구례에서 감이 도착해 있다.
지리산형의 감이 아니라 꽃이 보낸 감이다.
3년째구나.
이번 감은 나에게 의미가 새롭다.
알치하이머 병에 걸리신 꽃의 어머니께서 키우신 감이다.
지난 밤에 꽃이 윤진에게 문자를 보내서 감을 보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래서 이 감은 나에게 그냥 감이 아니다.
어떻게 이 고마움에 보답할 수 있을까.
이틀째 생각 중이다.
감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과일 자체를 별로 먹지 않지만)
이틀째 나는 이 씨없는 감을 아작 아작 맛있게 먹고 있다.
그리고 한번도 뵙지 못한 꽃의 어머니가 눈에 밟힌다.
내가 얼마 전에 이곳에서 쓴 글이지만 내가 인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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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잘 아는 커뮤니티 친구의 어머니는 알치하이머 병으로 고생하시고 계시다.
어제 서울대 병원에 입원하셔서 검사를 받고 며칠 입원하시면
오늘 연신내를 방문하기로 했는데 취소되었다.
어제 검사 전에 서울 병원에서는 그냥 똑 같은 검사 받을 필요없이 구례로 내려가서
일상생활을 하시라고...
어머님이 그러셨단다.

'감도 익어가고 있는데... 가야지...'

어떤 병이라도, 계절을 감지하고 수십년간 절기에 따른 노동 자체가 육신이 되어버린
어머님의 몸이 감지하는 본능을 강제하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구례의 그 어머님 감을 두해 가을 동안 얻어 먹었다.
유난히 크고 시원한 맛의 감이었는데.
당신의 몸은 감이 익어가는 것을 안다.
'감도 익어가고 있는데... 가야지...'
이런 말씀 앞에 나는 세상의 모든 시와 소설이란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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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 저래 구례는 내 인생에서 의미가 많은 곳이다.
그런 곳에서 몇년 사는 것도 좋은 일이 될 것이다.

4d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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