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dr Date : 2004/11/07
2004.11.7



토요일.
새벽 5:20분에 알람을 맞추어 두고 일어났다.
의외로 일어나는데 문제가 없었고 컨디션도 좋았다.
새벽에 아침까지 챙겨 먹고 길을 나섰다.
6시 16분에 연신내 3호선 지하철에 발을 올렸고
4호선 안산 한양대학교역에 7시 40분 경에 발을 내렸다.
문종석은 이미 와 있었다.
매번 미안하다.

성담이 형의 결혼식날이다.
빡빡한 일정이 시작된 것이다.
안산에서 강남으로 신랑을 모시고 출발했다.
역시 도로는 난감했고 예정보다 많은 시간을 소요한 끝에 샵에 도착했다.
3층으로 뛰어 올라가서 형수님을 찾아 두리번거리는데 화사하고 원숙한 이미지의
여인이 웃고 있다. 흔한 치례 말씀으로 신부에 대해 아름답다는 수식어를
사용하지만 참으로 간만에 아름다운 신부를 보았다.
예정보다 늦었지만 지체에 대한 일체의 말씀이 없었다.

형의 결혼식이 결정된 것은 사실 좀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이 문제에 대해 이런 저런 보안을 지킨다고 나름으로
문종석과 나의 고통이 극심했지만 우리는 끝까지 약속을 지켰다.
하지만 남도 쪽에서 누수현상이 생기면서 간혹 사실 확인차원의
전화를 받기도 했지만 부인으로 일관했다.
아트인컬쳐에 김지하 선생께서 형의 그림에 관한 글을 기고하시면서
결혼에 관한 것을 언급해버렸다.
한달여 전이다. 하지만 미술잡지란 것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읽지 않는다.
결혼 전 이미 수차례 청첩과 관련한 확인을 형에게 했지만
본인의 의사로 뭘 알리고 하는 일은 없을 듯 했다.
결국 며칠 전에 한겨레에 기사로 결혼소식이 나가면서
제반 상황은 엉망(?)이 되어버렸다.
오늘에사 한겨레에 기사가 나가게 된 원인을 알았는데
조회수 10회 정도 되는 거의 비공개 성격의 사이트 때문이었다니 그 참...






이 자리에서 나의 묘한 감정을 100% 전달하기는 힘들다.
그냥 묘한 감정의 여백들이 결혼식 과정을 지켜보는 동안 머리속에 머물렀다.
아들 승완이와 형이다.
이제 승완이가 스물 여섯인가?
나 역시 윤진과의 결혼식 전에 세월이 좀 더 지난 후 영후가 나의 결혼을,
어린 영후가 아닌 성인 영후로서 어떻게 받아들일까라는 생각들을 했었다.
좋은 생각, 나쁜생각 식의 이분법적인 생각이 아니라
당연하게도 그런 저런 상념들이 머리속에 자리잡는다.
나는 아직도 간혹 제 아버지 징역 가 있었던 시간 동안 승완이를 생각한다.
무등산 초입에서 아버지 등에 무등 타고 콜라 병 들고 활짝 웃고 있었던
승완이를 생각하는데 광주쪽 선배들의 기억은 좀 더 유별날 것이라는 짐작만 한다.
사진에 담지는 못했는데 호준이도 왔다.
황석영 선생의 장남이다.
국악을 전공한 호준이와는 두어차례 작업을 함께 진행한 인연으로 만나면 반갑다.
몇년 만에 녀석을 보았는데 딸아이를 데리고 있다.
'니꺼냐' 라고 물었더니
'예 ㅎㅎ'
호준이는 좀 더 마른 듯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둔 아비의 태가 난다.
승완이나 호준이나 93년 1월에 부산으로 쉬러 온 형과 홍희담 선생을 모시면서
해운대에서 본 것이 처음인데, 그때 녀석들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항상 세월의 당사자인 우리들만 보면 별 변동 없이 그냥 저냥 사건들을
겪고 살아온 것 같은데 2세들을 보면 영락없이 지금의 우리들 본 모습을 목격하고 만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와버렸고 결혼식은 성대하게 치루어졌다.
비디오 밧데리가 빨리 아웃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인사치레를 해야 할
손님들을 맞이한다고 나도 나름으로 정신이 없었다.
모든 결혼식의 끝이 그렇듯 마지막으로 신랑신부 친구분들과 직장동료들의
기념촬영이 있었다. 직장을 다닌 적이 없는 신랑의 공통점은 항상 시간 많은
친구들이 많다는 것인데 혜화동 성당 본당 입구 계단 전체를 다 채워버렸다.
연령을 무시하고 함께 선 사람들이 햇볕 아래 섰고 결국 올 것이 오고야 말았는데
부케를 받을 사람을 준비하기란 쉽지 않다.
결혼의 주인공이신 형과 형수님은 올해 함께 쉰이다.
어쩌겠는가. 하나 남은 사람은 최열형 뿐인데.
신랑의 꽃을 타의반 자의반으로 받았다.
사진 앞에서 나는 즐겁기도 하고 아련하기도 하다.
저기 서 있는 어떤 사람의 집에서 며칠을 신세지기도 했다.
도망다니던 시절이었는데.
결혼식장에서 대부분의 인사들과 인사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은 공유하고 있는
세월이 많다는 의미일 것이다.






뜻하지 않게 일본에서 서승선생님께서 참석하셔서 이런 저런 몇가지
일들도 있고 해서 결혼식 막바지에 찻집과 폐백실을 오가야했다.
잠시 고민하다가 원래 예정대로 형님과 형수님을 모시고 함께 이동하는 것으로
나의 동선을 정했다.
5시 가까워지면서 겨우 이동을 할 수 있었다.
신혼여행은 없다. 좀 더 시간 여유를 가지고 떠나실 것이다.
안산으로 바로 모시려했는데 시내 어느 호텔에서 형수님의 아주 가까운 친구분들과
잠시 자리를 하고 이동하기로 했다.

결혼식이란 참 피곤한 행사다.
해본 사람들은 아시겠지만 그 하루를 위해 죽여야 할 여러가지 것들이 있다.
허례도 있고 허식도 있다.
평소 내 삶의 철학이 그런 것들을 용인하지 않았더라도 그날 하루는 그 모든 것들을
용인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한마디로 신랑과 신부는 하룻 동안 연기자가 되어야는데
그 모든 집중은 '좋은 날' 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공식행사 끝내고 사진의 이런 자리는 긴장이 풀리고 편하고 나른할 수밖에 없다.
신부와 신랑은 이제서야 뒤늦은 식사겸 휴식을 취한다.

어제 하루 동안 나는 두가지 생각이 들었다.
하나는, 여자는 스무살이나 쉰살이나 여자라는 사실이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지만 나에게는 새롭기도 한 장면이다.
형수님은 하루종일 가볍게 흥분한 상태였고 시종일관 웃음이었다.
젊은 신혼부부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는 파인더 속에서 보이는 완숙미에도
불구하고 형수는 여느 결혼식의 신부와 다를 바 없이 들뜬 마음을
숨기지 않으셨고 많은 이야기를 하셨다.
두번째는, 내가 참으로 무뚝뚝한 남자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한 것이다.
형수의 들뜬 마음에 대해 형은 일일히 대꾸와 반응을 보였다.
안산으로 돌아가는 늦은 시간, 차 속에서 두분은 쉼없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셨는데
영락없는 신혼부부였다는 것이다.
주변인으로서 오랜 시간 형을 모셔왔지만 세상에 그럴 줄은 몰랐다.
하루에 안산을 두번 왕복한 꼴이니 피곤했다.
문종석은 운전까지 했으니 더 피곤했을 것이다.
11시 넘어 집으로 와서 나의 주특기 샤워를 끝내고
점심 뷔페, 저녁 겸 흑맥주 자리의 느끼한 양식을 밀어내기 위해
라면에 고추가루를 확 뿌렸다.
그리고 윤진에게 오늘 내가 느낀 두가지에 대해 이야기해 주고 싶었다.
물론 '앞으로 내가 잘하겠다는 것은 아니다'는 전제를 깔고.

4dr@naver.com


서버에 요청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